“박창수 위원장 영혼이라도 함께 공장 가고파”
금속노조 경기지부와 민주노총 경기중부지부가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91년 의문사 당한 박창수 열사 30주기를 맞아 고인이 숨진 경기도 안양에서 추모대회를 열었다.
5월 6일 저녁 안양샘병원 앞에서 연 ‘의문사 진상규명·열사 정신 계승·민주노조 사수, 박창수 열사 30주기 추모대회’에 열사 유가족과 노조 경기지부 조합원들, 부산양산지부 한진중공업지회가 함께했다.
심진호 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은 추모사에서 “열사와 같이 일했던 조합원 대부분 정년퇴직했을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라며 “고인이 목숨 바쳐 지키려던 민주주의와 민주노조가 30년이 지난 지금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라고 운을 뗐다.
심진호 지회장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다. 투기자본이 회사를 인수 중이고, 사측은 노동조합을 둘로 쪼갰다”라며 “힘들 때마다 열사가 외쳤던 ‘노동의 가치’를 떠올린다. 열사를 잊지 않고 노동이 인정받는 세상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금속노조 경기지부와 민주노총 경기중부지부가 5월 6일 저녁 안양샘병원 앞에서 ‘의문사 진상규명·열사 정신 계승·민주노조 사수, 박창수 열사 30주기 추모대회’를 열고 있다. 이날 추모대회에 열사 유가족과 노조 경기지부 조합원들, 부산양산지부 한진중공업지회가 함께했다. 박향주 |
▲ 심진호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이 5월 6일 ‘의문사 진상규명·열사 정신 계승·민주노조 사수, 박창수 열사 30주기 추모대회’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박향주 |
이날 추모제에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참석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추모사를 통해 “언제쯤이면 울지 않고 박창수 열사를 떠올릴 수 있을까”라며 “그는 청춘을 함께 보낸 친구였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함께 꿈꾸었던 동지였다”라고 회상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의문사로 남겨진 박창수 열사 죽음을 명백한 타살이라고 확신했다. 김 지도위원은 “하루는 동지들과 산에 올랐는데 같이 왔던 박창수 위원장 아들이 어디가 탈 났는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쓰러졌다. 아이를 업고 산길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가던 박창수의 모습을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라며 ”아이들을 보며 항상 봄꽃보다 환하게 웃던 그가 아이들을 둔 채 갑자기 자살할 이유가 없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이 보며 웃던 사람, 자살 이유 없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박창수 열사가 왜 억울하게 죽어야 했는지 반드시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지도위원은 “박창수 위원장을 변호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박창수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이 대통령이 됐다. 주검마저 빼앗긴 기막힌 세상을 살아 서른 번째 봄을 맞았지만, 여전히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라고 토로했다.
고 박창수 위원장과 한진중공업 배관공 입사 동기인 김진숙 지도위원은 “같이 복직하고 싶었던 내 동기, 박창수 위원장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주던 배관공장으로 다시 가고 싶다. 박창수 열사의 영혼이라도 함께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5월 6일 ‘의문사 진상규명·열사 정신 계승·민주노조 사수, 박창수 열사 30주기 추모대회’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박향주 |
박창수 열사는 1981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배관공으로 입사했다. 노조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 현장 동료들과 함께 어용노조를 몰아냈다. 이어 1990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에 당선됐다.
열사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아래 전노협) 투쟁에 앞장섰다. 중소기업노조 중심으로 1991년 1월 출범한 전노협에 조합원 3천5백 명의 한진중공업노조가 참여했다. 전노협 소속 사업장 중에 규모가 가장 컸다. 전노협과 대기업노조를 결합한 박창수 위원장은 당시 노태우 정권의 눈엣가시였다.
박창수 위원장은 1991년 2월 9일 경기 의정부에서 연 대우조선 투쟁 지원 연대 수련회에 참석했다가 현장에서 경찰에 잡혔다. 대공분실을 거쳐 ‘3자 개입금지’ 등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박창수 위원장은 5월 4일 부상 치료를 위해 경기 안양병원(현. 안양샘병원)에 입원했고, 이틀 뒤인 6일 새벽 병원 마당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5월 7일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와 고인의 시신을 도둑질했고, 강제 부검했다. 노태우 정권은 시신 강제 탈취를 위해 전경 22개 중대와 사복 진압경찰(백골단)을 동원했다. 경찰은 부검 뒤 고인이 처지를 비관해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고인이 죽기 전, 신원 미상 남자들이 박 위원장의 병실을 드나들었고 사망하기 직전 병원 옥상에 함께 올라간 사람이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쇠창살과 자물쇠로 잠긴 병원 7층 옥상에 박 위원장이 어떻게 올라갔고, 떨어져 죽으려던 사람이 왜 링거 바늘을 달고 옥상에 올라갔는지, 자살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정황이 많았다.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 국가정보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박창수 열사에 대한 전노협 탈퇴공작을 조직 차원에서 자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안기부가 박창수 위원장 수감 직후부터 전노협 탈퇴를 종용하며 고문한 사실을 확인했지만, 국정원의 자료 제출 거부 등으로 아직 죽음의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