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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6-10-09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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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마수운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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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왔다. 이 찬란한 계절이 나는 좋으면서도 조금 버겁다. 여름의 열기가 사라진 창백한 하늘과 서늘한 공기는 모든 생명체의 종말인 죽음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전혜린의 수필에 나오는 한 구절, ‘가을은 오솔길을 한없이 걸어가다가 길목에 있는 선술집에 들어가 ‘어린 포도주와 파란 호두’를 먹고 죽음 속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가 버리기에 꼭 적합한 계절’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종착역인 죽음의 모습은 가을과 엇비슷할까. 이런 생각은 나를 쓸쓸하게 하지만 또 약간의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가을의 풍경들, 특히 해가 저무는 가을 들판의 모습은 다가가기 무서울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에. 아르놀트 뵈클린, '피들을 연주하는 죽음과 함께 한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75×61 cm,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베를린, 1872년 /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1827~1901)에게 죽음은 늘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바젤 출신인 뵈클린은 70년 넘는, 당시 남자로서는 긴 생을 살았던 반면에 그의 주변 사람들은 기이할 정도로 빨리 세상을 떠났다. 10대 후반에 만난 첫 번째 약혼녀는 일찍 죽었고 두 번째 약혼녀는 결혼 직전에 마음이 변해 뵈클린의 곁을 떠났다. 로마에서 그림을 배운 뵈클린은 이탈리아 여성인 안젤라 파스쿠치와 스물여섯 살에 결혼했다. 부부는 무려 열네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이중 다섯이 유아기를 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성년으로 성장한 아홉 자녀 중 셋은 뵈클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중세도 아닌 19세기에 열넷의 아이를 낳은 것도 이례적인 일이긴 하지만, 그 아이들 중에 절반이 넘은 여덟 명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상황을 겪은 뵈클린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화가의 의식 언저리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 음습한 그림자는 잊을 만하면 뵈클린의 곁을 번개처럼 찾아와 사랑하는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앗아갔다. 죽음에 대한 옛사람들의 시각 유럽 화가들의 그림에는 일찍부터 죽음의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뵈클린과 같은 바젤 출신인 한스 홀바인 2세(1497~1543)는 ‘죽음의 무도’라는 이름으로 갖가지 상황의 죽음을 그렸다 바다이야기고래 . 해골처럼 그려진 죽음은 살짝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를 본 이는 누구도 웃지 않는다. 퉁퉁한 체구의 수도원장도,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귀족 부인도, 들판을 걸어가는 건장한 보부상도 죽음의 일격을 피하지 못한다. 당시의 권력층에 대한 은근한 풍자도 느껴지는 홀바인의 목판화 시리즈는 16세기 초반 바젤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도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 옆에서 희희낙락하며 수프를 먹는 노인의 모습을 그렸다. 이런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전통적인 죽음의 모습은 해골 같은 섬뜩한 형상이었다. 한스 홀바인 2세, <죽음의 무도> 연작 중 '수도원장'(왼쪽)과 '보부상'(오른쪽), 목판 인쇄, 1526년경(1538년 출판) /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프란시스코 고야, '수프를 먹는 두 노인', 벽화를 캔버스에 옮김, 49.3×83.4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1820~23년 /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뵈클린이 바라본 죽음은 달랐다. 해골처럼 무시무시한 죽음에게 자신의 아이들이 끌려갔을 거라는 생각은 화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뵈클린은 해골 대신 엄숙하고 장엄한 죽음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의 대표작이 된 ‘죽음의 섬’ 시리즈다. 어두운 밤, 작은 바위섬이 바다 너머 멀리 보인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연상시키는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섬의 군데군데 서 있다. 검은 바다 위에서 배 한 척이 섬으로 향하는 중이다. 배에는 뱃사공 한 사람, 하얀 관, 석고상처럼 우뚝 선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이 흰 석고상 같은 형체는 배에 실린 관에 몸을 누인 이의 영혼이다. 어둠 속에서 배가 향하는 섬은 죽음의 섬이다. 유럽인들은 묘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묘지에 사이프러스 나무를 많이 심었다. 섬에 다다른 죽은 이는 이승과 작별하고 영원한 안식 속에 고단한 몸을 눕히게 될 것이다. 최신바다게임 아르놀트 뵈클린, '죽음의 섬' 첫 번째 버전, 캔버스에 유채, 110.9×156.4 cm, 바젤 미술관, 바젤, 1880년 /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상징주의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들, 예를 들면 잠, 기억, 악몽, 꿈, 죽음 등을 정교하게 그린 유파다.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세기말의 불안을 회화에 담아낸 유파이기도 하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상징주의 화가인 뵈클린이 죽음을 소재로 삼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뵈클린이 다만 상징주의의 일환으로 죽음을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화가는 자신의 아이들이 무섭고 난폭한 죽음의 손에 끌려가지 않았다고, 평온하고 품위 있는 곳에서 영원한 잠을 자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싶었으리라. 뵈클린은 ‘죽음의 섬’에 대해 “문 두드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깊은 고요함에 잠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뵈클린은 엇비슷한 모습의 ‘죽음의 섬’을 모두 여섯 。 완성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버전은 거의 유사한 밤의 바다와 섬을 담고 있지만 세 번째 버전은 낮의 바다와 섬을 그리고 있다. 이 .만 보아도 죽음이라는 주제에 뵈클린이 오래도록 집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80년부터 1883년까지 그려진 첫 세 버전은 당시 피렌체에 머물고 있었던 뵈클린의 아틀리에 옆, 영국인 묘지의 풍경을 부분적으로 본떠 그린 것이다. 이 묘지에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화가의 딸 마리아의 무덤도 있었다. 아르놀트 뵈클린, '죽음의 섬' 세 번째 버전, 캔버스에 유채, 80×150 cm,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베를린, 1883년 /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뵈클린이 같은 그림을 여러 번 그리게 된 이유는 첫 번째 버전을 본 그의 후원자 마리 뵈르나 부인이 자신을 위해 이 그림을 한 번 더 그려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을 디프테리아로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뵈클린의 아틀리에를 방문했다 반쯤 완성된 ‘죽음의 섬’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마리 뵈르나는 그림을 통해 자신이 상상했던 죽음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만들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 때문에라도 이 그림을 꼭 갖고 싶어 했다 손오공사이트 . 뵈클린은 부인을 위해 오리지널보다 조금 더 작은 사이즈로 두 번째 ‘죽음의 섬’을 그렸다. 첫 번째로 그린 ‘죽음의 섬’은 바젤 미술관에, 뵈르나 부인을 위한 두 번째 버전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로도 뵈클린에게는 이 그림을 다시 그려달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았고 그 결과로 모두 여섯 .의 ‘죽음의 섬’이 완성되었다. 사람들이 뵈클린에게 ‘죽음의 섬’을 계속 그려달라고 요구한 이유는 뵈르나 부인과 엇비슷했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떠난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가 그림 속 장면 같은 곳에서 안식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했다. 음악으로 재탄생한 ‘죽음의 섬’ ‘죽음의 섬’ 이미지에 매료된 사람들 중에는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도 있었다. 라흐마니노프는 1907년에 사진으로 ‘죽음의 섬’을 접하고 강렬한 영감을 받았다. 그는 이 영감을 연주 시간 20분이 넘는 장대한 교향시 ‘죽음의 섬’으로 완성시켰다. 곡의 전반부는 밤의 바다와 작은 배를 연상케 하는 음산한 선율로 가득하다. 곡의 후반부에는 죽음의 고통을 넘어서 안식으로 향하는 망자의 발걸음처럼 장엄하고 낭만적인 총주가 펼쳐진다. 당시 작곡가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라흐마니노프는 그림이 보여주는 장면을 음악으로 재현하는 탁월한 솜씨를 선보이고 있다. [라흐마니노프 ‘죽음의 섬’(지휘. 앤드루 데이비스, 연주.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그러나 이 ‘그림과 음악의 만남’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교향시 ‘죽음의 섬’은 1909년에 완성되어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다. 그때까지 라흐마니노프는 ‘죽음의 섬’ 그림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영감을 준 ‘죽음의 섬’은 흑백으로 촬영된 사진이었다. 초연을 지휘한 후에야 라흐마니노프는 ‘죽음의 섬’ 그림을 보았고 원본이 흑백이 아니라 여러 색채를 사용해 그려진 그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흐마니노프는 크게 실망했다. 훗날 그는 “나는 ‘죽음의 섬’이 흑백으로 그려진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다. 만약 내가 사진이 아니라 그림을 먼저 보았다면 ‘죽음의 섬’을 작곡할 영감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라흐마니노프가 생각했던 죽음의 빛깔은 아무런 색채도 없는, 다만 무채색이었다. 전원경 예술 전문 작가·세종사이버대 교수 흐마니노프는 그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