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우 국가무형유산 궁중채화 2대 보유자가 조선 왕실 잔치에 놓였던 화준을 재현한 채화 작품 옆에 섰다. 최 보유자는 “궁중채화는 단순한 장식이 아닌 하나의 조형물이자 우리 문화를 전달하는 미디어”라고 말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흰 복숭아꽃 2000송이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지난달 ‘2026 가을 궁중문화축전’이 열린 창덕궁 희정당 접견실 한복판에 놓인 커다란 벽도화(흰 복숭아꽃) 나무. 완연한 가을에 웬 봄꽃이 만발했나 의아해하던 관람객들은 가까이 다가가서야 비로소 가짜 꽃임을 깨닫고는 그 정교함에 감탄했다.
진짜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비단꽃은 최성우(66) 국가무형유산 궁중채화(宮中綵花) 보유자가 손으로 일일이 자르고 붙여서 만든 작품이었다. 궁중채화는 조선 왕실 연회와 의례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요소였다. 채화를 전담 제작·관리하는 화장(花匠)이라는 관직을 따로 둘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 왕조의 몰락과 일제강。기를 거치며 궁중 의례는 폐지됐고, 화장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질 뻔했던 궁중채화의 맥을 되살려낸 인물은 국가무형유산 궁중채화 1대 보유자 황수로(91) 박사다. 지난해 6월, 황 박사의 장남이자 한국궁중꽃박물관 관장인 최씨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 궁중채화 2대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프랑스에서 미술사와 문화경영을 전공하고 서울 서촌 낡은 여관과 부산 초량동 적산가옥을 각각 복합문화공간 ‘보안1942’와 ‘오초량’으로 탈바꿈시킨 문화기획자는 어떻게 ‘꽃을 만드는 남자’가 됐을까. 경남 양산에 있는 궁중꽃박물관에서 만난 최 관장은 “채화는 생화를 흉내 낸 장식이 아니라 자연을 창의적으로 재구성한 창조물”이라고 말했다.
자연의 꽃 꺾지 말고 만들어 쓰라
-궁중채화, 여전히 생소합니다.
“조선 시대 궁중 연회와 의례를 장식하기 위해 비단·모시·종이 등으로 빚은 가화(假花)입니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 열린 잔치는 꽃잔치라고 할 만큼 많은 채화로 꾸몄습니다. 잔치마당 좌우에 커다란 꽃병과 채화주(綵花株)를 두었고, 음식상에도 채화 꽃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무희와 악공은 물론 내빈과 외빈, 심지어 군사들까지 모자나 머리에 꽃을 꽂았지요. 장식품을 넘어 왕실의 지엄한 권위와 품격을 상징하는 예술의 결정체입니다.”
-부와 권력이 집중된 왕실에서 진짜 꽃 대신 채화를 쓴 이유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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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계절의 한계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궁중 잔치는 꽃이 피지 않는 겨울에도 열렸기 때문에 생화 조달이 힘들었습니다. 잔치가 길게는 열이틀까지 이어진 。 역시 한 요인입니다. 또 의궤에 ‘자연의 꽃을 꺾지 말고 만들어 쓰라’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조선 왕실의 생명 존중 철학이죠. 한낱 유흥을 위해 살아 있는 생명인 꽃을 꺾을 수 없다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시들지 않는 꽃을 통해 왕조의 영원성과 번영을 상징하려는 의미도 담겼습니다. 그래서 채화를 자연의 꽃보다 더 웅장하고 아름답게 피워낸 것입니다.”
-제작 과정이 까다롭다고 들었습니다.
“엄청난 인내와 공력이 필요합니다. 붉은 복숭아꽃인 홍도화(紅桃花) 한 송이를 만들려면 염료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홍화 꽃잎을 물로 씻어서 붉은 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밟아 둥그렇고 납작하게 뭉쳐 ‘홍화떡’을 만듭니다. 이제 비단에 색을 입히는데, 최소 다섯 번 겹쳐 물들이는 ‘복합염’ 과정을 거쳐야 깊고 우아한 붉은빛이 돕니다. 염색된 비단을 꽃잎 모양으로 오리고, 불에 달군 인두로 밀랍을 녹여 얇게 코팅하며 꽃잎 모양을 잡습니다. 모시에 풀을 먹여 힘을 준 다음, 올올이 풀어 치자 염색을 하고 송홧가루를 올 끝에 발라줍니다. 꽃잎 두 장을 미리 준비한 꽃봉오리·이파리와 함께 대나무를 다듬은 가지에 붙이면 비로소 꽃 한 송이가 완성됩니다. 채화 작품 한 . 만드는 데 길게는 1년 넘게 걸립니다. 자연에서 살아 있는 꽃을 만나는 데 1년을 기다려야 하듯요.”
-채화는 언제 시작됐나요.
“본격적인 역사는 고려 시대부터 확인됩니다. (어머니) 황 박사님은 채화의 시작을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에서 찾았습니다.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살아생전 좋아했던 모란꽃을 채화로 만들어 방에 꽂아두고 온종일 봤답니다. 조선 시대에는 머리에 꽃을 꽂는 잠화(簪花)가 왕실 중요 행사나 국연 의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검약을 중시하는 유교 국가 조선에서 채화로 잔치를 베푸는 일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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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서 채화가 활성화된 계기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인 ‘원행을묘’ 행사입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사용된 채화가 모두 1만1919개라고 나옵니다. 고종과 순종 때까지 채화는 궁중 문화로 자리 잡게 됩니다.”
-채화와 화장의 위상은 어땠나요.
“조선왕조실록과 의궤에 어떤 재료로 무슨 꽃을 몇 송이 만들었는지 치밀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궁에만 화장이 22명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큰 연회가 열리면 전국에서 화장 수백 명이 차출됐습니다. 봉급도 다른 궁궐 장인보다 높았고요.”
-채화 전통이 한때 사라졌던 이유는.
“대한제국이 몰락하면서 궁중 의례가 전면 폐지됐습니다. 나라를 잃으니 잔치가 열릴 일이 없고, 쓰임새가 없어진 화장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사라질 뻔했던 궁중채화를 되살린 황수로 국가무형유산 궁중채화 1대 보유자. 최 보유자의 어머니다. /한국궁중꽃박물관
궁중채화 되살려낸 황수로 보유자
그렇게 단절될 뻔했던 채화 전통을 되살려낸 이가 황수로 1대 보유자다. 그는 국내 최초로 코르덴(골덴)과 우단을 생산해 ‘코르덴의 아버지’로 유명한 고(故) 황래성 태창기업 창업자의 딸이다.
-황 보유자가 채화를 복원하게 된 계기가 일본 유학이라고.
“교수셨던 아버님이 1960년대 도쿄로 유학 갈 때 함께 가셨어요. 거기서 꽃꽂이와 다도 공부를 시작하셨는데, 일본인 선생이 ‘한국에는 차나 꽃 장식 문화가 없다’고 하더랍니다. 어머니가 ‘아니다’라고 반박하셨대요. 어머니의 외할아버지가 고종 때 궁내부 주사를 지내셨고, 때때로 고종이 하사한 비단 꽃 잠화를 집으로 가져온 걸 직접 보셨거든요. 당신의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채화를 만들기도 하셨고요. 하지만 보관이 어려워 유물로 남겨진 게 없었어요.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애태우다 채화를 복원하기로 마음먹으셨죠.”
-스승 한 명 없이 어떻게 복원했나요.
“쉽지 않았죠. 사료는 희귀했고, 유물도 거의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등을 뒤져가며 채화 기법을 조금씩 되살렸습니다. 동해안 별신굿 지화장에게서 종이꽃을, 대인사 이도주 스님에게서 사찰의 가화를 배웠습니다. 2013년 국가무형유산 보유자로 지정됐고, 2019년에는 사재를 털어 한국궁중꽃박물관을 건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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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꽃박물관은 채화를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지 면적 5041㎡, 연면적 1394㎡ 규모로 전통 한옥과 현대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룬 ‘비해당(匪懈堂)’과 ‘수로재(水路齋)’로 구성됐다. 김봉렬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과 조정구 구가도시건축 소장이 건물 설계를 맡았고, 국가무형유산 제120호 석장 이재순, 제48호 단청장 동원 스님, 대목장 조재량 등 장인들이 대거 공사에 참여했다.
수로재 제1전시실은 고종 정해년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팔순을 경축하기 위해 열린 ‘고종정해진찬연’을 재현했다. 잔칫상 양쪽에 놓인 화준(花樽·꽃항아리) 두 .에만 오얏꽃 2만송이가 달렸다. 제2전시실은 조선 후기 북학파 문인들이 즐겨 제작하고 감상한 밀랍 매화 ‘윤회매(輪廻梅)’를 볼 수 있다. 비해당 제1전시실에는 순정효황후의 장지마을 내실을 재현하고, 제2·3전시실은 궁중채화 및 특수 기획 전시가 마련된다.
-보유자 지정도 쉽지 않았다고.
“당시만 해도 채화가 뭔지 사람들이 몰랐어요. 처음 인간문화재 지정 신청을 했을 때 문화재위원들이 ‘동대문시장에서 조화(造花)를 사온 것 아니냐’고 의심할 정도였지요.”
-채화, 혹은 전통 가화와 현대 조화의 차이는 뭘까요.
“고속버스터미널 상가에서 파는 그 많은 조화는 다 똑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드는 채화는 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달라요. 조화는 자연의 카피잖아요. 채화는 자연을 베끼는 게 아닙니다.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을 바탕으로 인간이 새로운 창조를 하는 거죠.”
-진짜 벌과 나비가 날아들기도 한다면서요.
“수술은 한 가닥 한 가닥 모두 송홧가루와 꿀을 묻혀 만듭니다. 2004년 덕수궁에서 세계박물관대회 특별전으로 전시했을 때 이 향기를 맡고 실제 꽃으로 착각한 나비가 날아드는 모습에 관람객들이 찬탄했죠.”
궁중채화는 작품 한 .이 완성될 때까지 길게는 1년이 넘게 걸린다. 벌과 나비, 새까지 함께 만들어 붙인다. 수술 한 가닥 한 가닥 송홧가루와 꿀을 묻힌다. 최 보유자는 “이 향을 맡고 진짜 벌과 나비가 날아들기도 한다”고 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 문화 세계에 알리는 미디어
최 관장은 궁중채화를 연구하고 만드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하지만 “궁중채화를 잇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제안을 오랫동안 거절하다가, 2007년 유엔본부 전시를 계기로 마음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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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이 본업이죠.
“경희대 미술교육학과에서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졸업 무렵 만화영화(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겠다는 꿈이 컸습니다. 그래서 1987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막상 현지에 가보니 만화영화를 전문적으로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았어요. 파리 1대학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이어 디종 대학으로 옮겨 문화경영학으로 DEA(박사준비과정)를 마쳤습니다.”
-유학 시절 프랑스 문화부 국제 교육 과정에 선발됐다면서요.
“당시 프랑스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자크 랑 문화부 장관 시절로, 문화 예술 정책의 최정。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랑 장관이 전 세계 젊은 문화 인력을 모아 교육하는 ‘국제 문화 경영 연수단원(Formation Internationale)’ 프로그램을 기획했는데, 거기에 선발됐어요. 단원 13명 중 유일한 비(非)불어권 출신이자 아시아인이었죠. 덕분에 프랑스 정부 지원을 받으며 다양한 연구 조사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퐁피두센터의 수집 정책에 대해 당시 관장과 대담하고 관련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온 동료들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쌓은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서촌 낡은 여관을 고쳐 복합문화공간 ‘보안1942’를 열었습니다.
“1993년 귀국해 집안 사업을 하다가 2007년 통의동 보안여관을 인수했습니다. 처음에는 허물고 새 건물을 지으려 했죠. 낡은 천장을 뜯어내다 상량판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어로 ‘1942년 이 여관이 지어졌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후 이 여관이 문인과 예술인의 아지트였음을 알게 됐죠. 허물고 새 건물을 지으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건물이 품은 역사를 지키기로 했죠.”
보안여관은 서정주·김동리·김달진·오장환·이상 등 문인뿐 아니라 이중섭·구본웅 같은 화가들도 장기 투숙하며 작품 활동을 하던 공간이다. 서정주는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이 보안여관에서 창간됐다”고 자서전에 밝히기도 했다. 시인부락이 1936년 11월 창간됐으니, 1930년대부터 여관이 운영됐고 1942년 증축한 것으로 짐작된다.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보안1942에서는 다양한 전시와 문화 기획이 열리고 있다.
1930년대 지어진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을 고쳐 만든 복합문화공간 '보안1942'. /보안1942
-처음엔 어머니의 전수 권유를 거부했던 이유는.
“남자가 꽃을 만든다는 데 대한 거부감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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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기획하는 것이 내 일이지, 실무를 직접 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생각했고요.”
-유엔본부 전시가 어떻게 마음을 바꾼 건가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취임을 기념해 한국 전통 공예품 전시가 열렸습니다. ‘직지심체요절’ 영인본과 달항아리 등 150여 。에 달하는 작품이 전시됐는데, 유독 궁중채화 작품 앞에서 관람객 발길이 멈춰 섰습니다. 전통 공예는 문화적 배경 설명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꽃은 설명이 필요 없더군요. 문화기획자의 시선으로 보니, 궁중채화는 단순히 장식이 아니라 하나의 조형물이자 문화를 전달하는 미디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경험을 계기로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채화를 직접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궁중채화가 우리 문화를 알리는 매개체라고요.
“지난해 경주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와 2024년 프랑스 파리 올림픽 때 열린 코리아하우스 전시에서도 이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을 존중해 꽃을 꺾지 않고 비단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조선 왕실의 애물(愛物) 철학을 설명해주면 외국인 관람객들이 더 감동받더군요. 화려함 안에 담긴 생명 존중 철학이 현대인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입니다. 게다가 세계적으로도 궁중 연회를 위해 수천수만 송이 비단꽃을 체계적으로 제작해 사용한 사례는 찾기 어렵습니다. 지난해 중국 실크박물관 관장이 방한했을 때 궁중채화를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비단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 전문가인 그도 이런 사례를 본 적이 없다면서요. 그 일을 계기로 가치가 더욱 분명해졌죠. 궁중채화는 단순히 보전해야 할 유산을 넘어 한국 문화를 세계에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독보적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채화를 이어가면서 가장 감동과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나뭇가지에 꽃잎을 하나하나 붙여가며 꽃나무를 완성해가다 보면 마치 생명을 피워 올리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때의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궁중채화 2대 보유자이자 궁중꽃박물관 관장으로서 목표는 뭔가요.
“어머니가 한평생 바쳐 복원한 궁중채화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박물관에서 전수 교육과 궁중채화 제작에 힘쓰고 있습니다. 서울 등 수도권에서 활성화와 저변 확대를 위해 보안1942에 ‘궁중채화서울랩’을 만들어 전문가 과정을 개설했고요. 첫해인 2020년에는 인원을 채우지 못했는데, 올해는 6명 모집에 22명이 지원했습니다. 궁중채화에 대한 인식과 인지도가 크게 달라졌음을 실감합니다.”
감동과 보람을 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