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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6-09-18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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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마수운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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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우측 끝으로 가면 뜻하지 않은 유물 한 。을 만나게 된다. 서울 북묘의 건립 발자취를 담은 북묘묘정비(北廟廟庭碑)이다. 고종과 민비(명성황후)가 '용한 무당' 진령군 박씨에게 헌당한 북묘의 연혁기인 셈이다. 1887년 세운 이 비문은 조선이 관우를 기리게 된 경위, 북묘를 세운 내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종이 직접 짓고, 민영환이 해서체로 썼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구원병으로 왔을 때 관우가 여러 번 영검을 보여 팔도가 수복됐는데 어느 날 관우가 나와 왕비의 꿈속에 현몽하여 지성스럽게 돌봐주는 듯한 생각이 들어 송동(宋洞=현 서울 명륜동) 증주벽립 바위 아래 세우기로 했다…' 서울 명륜동 옛 북묘 정전. 고종과 명성황후가 관우가 현몽했다며 건립했다. 갑신정변 당시 싸움터이기도 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세기 말 열강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된 가운데 고종은 관우 사당이라도 지어 바람 앞에 등불 신세의 왕조를 구해 보려고 하는 마음 같으나 정작 그 속내는 무속에 빠진 왕비의 주술 효과에 등 떠밀린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정국 속사정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지난 24일 찾은 그 송동 '증주벽립(曾朱壁立)' 음각 바위 아래 동네, 즉 옛 북관왕묘(북묘) 일대는 평범한 주택가와 다를 바 없었다 모바일 바다이야기기계 . 지금의 서울 명륜동·혜화동 경계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증주벽립 일대는 퇴로가 입구뿐인 외길이라고 했다. 수직 암벽과 성벽 그리고 학교 담에 ∩자 형태로 막혀 있다. 그 퇴로 없는 동네 골목길에 이런 표지석 하나가 무심히 자리한다. '3·1운동 기념 터: 불교중앙학림' 1919년 삼일만세운동 거사를 위해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불교중앙학림 학생들과 함께 전국 불교도들의 시위 계획을 논한 곳이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만해는 당시 불교중앙학림 교수였다. 그는 삼일만세운동에 불교계 대표로 참여했다. 그는 3월 1일 하루 전날인 2월 28일 미리 인쇄된 독립선언서 3000여 장을 받아 중앙학림 학생들에게 건넨 후 다음 날 오후 1시 배포케 했다. 만해는 3·1운동 당일 동지들과 종로 태화관에 모여 이들을 대표해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 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라고 연설하고 만세 삼창했다. 그리고 일경에게 체포됐다. 그는 감옥 안에서 함께 붙잡혀 온 민족 대표들이 극형에 처해질 것에 통곡하자 "이것이 민족 대표의 모습이냐. 바다이야기릴게임공략 당장 취소해 버려라"하며 호통을 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법정 투쟁 과정에서 "일본은 망한다"라는 주장을 거두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구석진 곳에 자리한 '북묘묘정비'. 고종이 글을 짓고, 민영환이 글씨를 썼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만해가 이런 기개로 교편을 잡았던 불교중앙학림은 그의 지도로 김법린 백성욱 신상완 김대용 등이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그리고 그들은 만세운동 후에도 비밀결사 '만당'을 결성, 불교민족운동의 거. 역할을 했다. 이에 일제는 1922년 불교중앙학림을 강제 폐교하고 제도권 교육을 빙자해 불교전수학교로 편입시킨다. 불교계 민족운동 영향력을 줄이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일제 말이 되자 중앙불교전문학교, 혜화전문학교, 혜화농업전문학교 순으로 천황폐하를 위한 학교로 만들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서야 법통을 살려 동국대학이 됐다. 애초 동국대의 뿌리는 동대문 밖 원흥사(현 창신초교 자리)에서 시작된 근대 불교 학교 명진학교(1915년 설립)였다. 그 두 번째 캠퍼스였던 불교중앙학림. 그 터에 들어선 학림의 처음은 흥덕사·태조 이성계 사저였다. 그리고 송시열 저택~북묘~중앙학림 등으로 이어졌다 이 학교는 해방 후 서울 필동으로 이전하면서 땅이 쪼개어 민간 분양됐다. 그 뒤로 오늘날과 같은 빌라와 단독주택의 평범한 마을이 된 것이다. <3편·끝> 울 필동으로 이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