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영 신영증권 연금사업부 상무·경영학(연금금융) 박사
우리나라 퇴직연금에는 디폴트옵션이 있다. 가입자가 별도 운용지시를 하지 않으면 미리 정한 방법으로 자산을 자동 운용해주는 제도다.
은퇴 이후 정작 더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는 디폴트옵션이 없다.
60세에 은퇴해 90세까지 산다면 30년간 자산을 관리해야 한다. 주식 비중이 높으면 시장 급락이 두렵고, 예금에만 넣어두면 물가 상승과 장수 위험을 감당하기 어렵다. 너무 많이 인출하면 돈이 일찍 바닥나고, 너무 적게 쓰면 평생 모은 돈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은퇴 직후 시장이 급락하면 생활비 때문에 가격이 내려간 자산을 팔아야 하는 ‘수익률 순서 위험(sequence-of-returns risk)’도 커진다.
퇴직금을 개인형 퇴직연금(IRP)으로 받는 순간부터 이 복잡한 문제는 사실상 개인의 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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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배분과 인출액, 국민연금 수령 전 소득 공백까지 모두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금융 전문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을 평범한 은퇴자가 감당하는 셈이다.
행동경제학이 보여주듯 선택이 어려우면 사람들은 결정을 미루거나 익숙한 방법에 안주하기 쉽다. 그래서 ‘은퇴 후 디폴트옵션’이 필요하다. 별도로 선택하지 않아도 정해진 원칙에 따라 자산을 운용하고, 매달 생활비를 지급하는 장치다. 예컨대 단기 생활비는 현금성 자산에, 중기 자금은 채권에, 장기 자금은 주식에 나누어 두고 시간이 지나면서 순차적으로 생활비 계정으로 옮길 수 있다. 핵심은 운용과 인출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연금자산이 큰 나라들도 같은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호주는 사업자에게 은퇴소득 지원 전략을 의무화한 ‘은퇴소득계약(RIC)’을 도입했고, 미국도 401(k) 자산을 평생소득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주요 과제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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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금제도의 관심이 ‘축적’에서 ‘인출’로 옮겨가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도 퇴직급여를 연금으로 받도록 세제 혜택을 확대해왔다. 방향은 맞지만 세금만 깎아준다고 좋은 노후소득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금으로 받으세요”라는 권유와 “어떻게 받을 것인가”를 설계하는 일은 차원이 다르다. 은퇴 후 디폴트옵션은 공적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을 함께 고려해 평생 현금흐름을 설계하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퇴직연금의 경쟁은 수익률과 적립금 규모에 집중돼 있었다. 하지만 은퇴자가 늘어나는 시대에는 거대해진 적립금을 실제 노후소득으로 바꾸는 능력이 새로운 KPI가 되어야 한다. 퇴직연금의 성공은 퇴직하는 날 계좌에 찍힌 숫자가 아니다. 그 돈이 은퇴자의 통장에 매달 얼마씩, 얼마나 오래 들어오는가로 결정된다.
민주영 신영증권 연금사업부 상무·경영학(연금금융)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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