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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6-09-25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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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진단은 왜 빗나갔을까 불행하지 않은데 자꾸 괴로워지는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자신감에 찬 표정의 의사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번아웃', 'K-장녀', '고용 불안' 같은 진단을 스피드퀴즈 정답처럼 내뱉었다. 원인 파악과 해법이 간절해 제 발로 찾아간 것이었지만, 정작 그 신속한 분석 앞에서 기분은 찜찜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어느 것 하나도 나를 완전히 꿰뚫지는 못했다. 출처. unsplash 사실 우리는 말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경험, 감정, 상황을 종종 겪는다. 그것을 언어로 정확히 묘사하기란 굉장히 난이도 높고 불가능할 때가 많다. 나는 그런 순간마다 피아노 앞에 앉아 끌리는 곡을 연습하곤 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던 감정들을 꼭 다 아는 듯 호응하는 음악들이 찾아졌다. 어떤 날에는 쇼팽의 녹턴이, 어떤 날에는 베토벤의 소나타가 마중 나왔다. 그래서였을까. 멘델스존이 언어와 음악의 힘에 대해 이런 말을 했던 것은. "나는 말이 그런 과제를 달성하는 데 충분하다고 믿지 않아. 만약 충분하다면 난 더 이상 음악을 만들지 않겠지. 사람들은 대개 음악의 의미가 너무나 다면적이라고 불평해. (...) 내게는 정확하게 그와 반대지. (...) 내가 사랑하는 음악들이 내게 표현해 주는 생각들은 말로 표현하기에 너무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너무나 확정적이야." - 『멘델스존』, 닐 웬본 지음, 김병화 옮김, 포노 펠릭스 멘델스존 / 출처.picryl 펠릭스 멘델스존, ‘말 없는 노래’의 탄생 6곡씩 8권, 총 48곡의 작은 곡들로 묶인 멘델스존의 <무언가>는 이름 그대로 ‘말 없는 노래’라는 뜻이다. 전통적 가곡처럼 성악가가 가사를 부르는 대신 피아노가 노래까지 맡는다. 당시 존 필드의 녹턴이나 슈베르트의 음악처럼 피아노 작품에서 서정적인 선율은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멘델스존의 업적은 “음악이 지닌 소통의 힘을 전달하기 위해 반드시 텍스트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황금성 다운로드 .”라고 주장하며 피아노 작품들이 본래 지닌 서정성만으로도 충분히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정말 아무런 말 없이도 음악 본연이 갖는 정서나 특성이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질까? <무언가> 중 지금은 ‘봄의 노래’라고 불리는 Op.62, No.6을 동생에게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들려줬다. 동생은 부드럽고, 따뜻하며, 한들거리는 우리 집 강아지 털이 생각난다는 감상을 전했다. 아주 사적이고 어설픈 실험이지만 ‘봄’과 ‘강아지 털’이 지칭하는 대상은 달라도 지닌 온도나 촉감, 감흥이 크게 이질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멘델스존의 주장에 한 걸음 더 솔깃해졌다. [펠릭스 멘델스존, <무언가> Op.62, No.6 '봄의 노래' (연주: 안드라스 쉬프)] 만약 ‘봄의 노래’라는 제목을 미리 알고 곡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봄’이라는 단어가 음악을 더 잘 이해하고 기억하도록 도울 수도 있지만, 들을 수 있는 풍경의 범위를 좁힐 수도 있다. 멘델스존은 ‘음악 자체가 지닌 정확성’에 방。을 두었겠지만, 동시에 텍스트 없는 노래인 <무언가>는 어떤 단어, 이름이 그 대상을 바라보는 방향을 결정짓고 때론 불충분하거나 과도하게 포용하는 특성 또한 상기시킨다. 이름에 갇히지 않은 파니 멘델스존 멘델스존이 바흐, 헨델 못지않게 좋아하고 영향받은 음악가를 꼽으라면 단연, 누나인 파니 멘델스존일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바흐의 푸가를 연주하기에 완벽한 손가락”이라 불린 이 아이는 동생인 펠릭스 멘델스존의 소울메이트이자 음악 지도자였다. 펠릭스가 13살이었을 때 파니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펠릭스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기 전에는 어떤 악상도 써나가지 않았지." 전 생애에 걸쳐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을 솔직하게 평가하고 의견을 구하는 사이였다. 파니 멘델스존 / 출처. 위키피디아 모바일 야마토5게임다운로드 그러나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재력, 어린 나이부터 받았던 체계적인 교육, 음악에 대한 천재성과 열정 등 동생과 동일한 환경과 조건 속에 놓여있었음에도 파니는 펠릭스처럼 음악가로서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번영하는 삶을 누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파니에게 붙어있던 ‘여성’이라는 수식어 때문이었다. 파니가 15살 때 남동생에게 몇 개의 가곡을 막 보냈을 무렵, 아버지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다. "펠릭스에게 음악은 직업이 될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너에게 음악은 장식품 같은 것일 뿐. 그것이 네 삶의 중심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 펠릭스가 칭송을 받을 때 너 역시 기쁨을 느끼지 않느냐? 그건 너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일 테다. 그러니 앞으로도 분별 있게 처신하도록 해라. 그것이 여자다운 것이고, 여성스럽게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명예로운 일이란다." - 『세이렌의 노래』, 이디스 재크 지음, 배인혜 옮김, 만복당 말은 강력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재능에 부합하는 양질의 교육을 아낌없이 제공했음에도 당시 ‘여성’이라는 이름이 가진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펠릭스 멘델스존조차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에게 ‘살림하느라 바쁜 누나는 작곡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 작곡할 자질도 없다’면서 누나의 작품 발표에 찬성할 수 없다는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마치 표제가 붙은 음악이 다른 어떤 상상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한 사람을 설명하는 단어 하나가 그 사람의 가능성과 행동을 결정하는 울타리가 된 셈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말의 힘에 구애받지 않는다. 파니가 그랬다. 24살에 결혼해 가정을 꾸리게 된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출판할 수 없었어도 끊임없이 곡을 썼다. 다행히 곁에서 열렬히 독려하는 남편 헨젤이 있었고, 펠릭스 또한 자기 이름으로 누나의 가곡 중 몇 편을 발표하도록 했다. 파니는 가곡, 피아노 독주곡, 현악사중주, 관현악 서곡, 칸타타 등 여러 장르에 걸쳐 450여 곡을 남겼다 야마토다운 . ‘여성’이라는 이름이 그녀에게 허락한 삶과 실제 그녀의 삶에는 이토록 큰 간극이 있었다. 40살인 1846년에는 가곡과 피아노곡 등을 자신의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이듬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녀의 더 많은 작품이 일찍부터 세상의 빛을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빌헬름 헨젤, <임종을 맞은 파니 헨젤>, 1847, 베를린 국립박물관 판화·소묘관 / 사진. ⓒ Jorg P. Anders, 출처. Deutsche Digitale Bibliothek [파니 멘델스존 생전에 출판된 <피아노를 위한 4개의 가곡> Op.2 中, No.1 'Andante'. 이 음반은 멘델스존 남매의 <무언가>를 선별해 포르테피아노로 연주했다. (연주: 올가 파셴코)] 모든 이름에는 ‘바깥’이 있다 혼란스럽고 모호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언어라는 부표는 소중하다. 그래서 인간은 무언가를 정의하고, 의미를 말로 엮고, 이름 붙이기를 참지 못한다. 극히 일부의 곡을 제외하면 펠릭스 멘델스존이 별도의 제목을 붙이지 않았던 <무언가>에도, 사후 출판 과정에서 ‘달콤한 회상’, ‘위안’, ‘봄의 노래’ 같은 이름들이 하나하나 붙었다. 나 역시 무엇이든 나만의 말로 규정하고 의미를 두는 일을 무척 좋아한다. 대상을 분석하고 세심히 판단해 어떤 이름을 붙이고 수식어를 부여하는 일은 내가 무언가를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배짱을 부려 좋아하는 음악에 나만의 의미를 찾겠다면서 이 칼럼을 꿋꿋이 쓰는 이유도 그 연장선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말로 규정하고 논리로 엮으며 이름을 붙이려 애쓰던 나에게, <무언가>는 이름을 붙이는 일의 애틋함과 동시에 어떤 이름도 결코 그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정확히 설명하려는 사랑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모든 이름에는 언제나 바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럴 수 있다면 나를 제한하거나 규정하는 수식어들에 지나치게 휘둘리지 않고, 나의 시간에 섣불리 답을 내려 조바심 내는 대신, 그 안의 작은 순간들을 감각하고 관찰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김수미 음악 칼럼니스트 처럼 피아노 작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