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내가 미쳤지.”
말레이시아 티오만섬 앞바다에 들어갔다 나온 직후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다. 티오만섬은 1958년 할리우드 영화 ‘남태평양’ 속 지상낙원 ‘발리 하이’의 배경으로 알려진 곳이다. 우뚝 솟은 암봉과 우거진 정글은 날아가던 용이 반해 내려앉았다는 전설이 있다. 해변 야자수 밑으로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파도로 밀려와 하얗게 부서진다. 잘 보존된 해양 생태계까지 갖추고 있어 스쿠버다이빙과 스노클링을 즐기려는 인파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다. 나 역시 스쿠버다이빙 기초 과정을 배우기 위해 티오만섬으로 향했다.
당초 세계 여행을 위한 나의 준비물은 소박했다. 예방접종 몇 가지와 여행자보험, 튼튼한 배낭, 첫 목적지 항공권이 전부였다. ‘발길 닿는 대로 간다’는 말을 여행 테마로 삼았다. 막상 이역만리 떨어진 공항에 내리자 설렘 대신 막막함이 쏟아졌다. ‘뭘 하지?’ ‘어디 가지?’ ‘뭘 먹지?’ 질문들이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꼬리를 물었다. 결국 여행 초기 한 달은 인공지능(AI) 챗봇과 유튜브 여행 채널, 투어 프로그램에 의존해야 했다.
나름의 ‘검증’을 거친 그 방법들이 나쁜 건 아니었다. 다만 베트남 후에를 여행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 왕조의 마지막 수도였던 이곳에서는 사진보다 가이드의 베트남 근대사 설명이 더 값진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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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세계여행이 노트북에 가득한 사진과 영상으로 끝난다면 너무나 공허할 것 같았다. 그때부터 기회가 닿는 대로 한 가지씩 배워 보자고 마음먹었다.
운동에 젬병이었던 내게 스쿠버다이빙은 거대한 벽이었다. 첫날부터 해변으로 장비를 메고 가 9m 깊이의 바닷속 훈련장으로 갔다. 이미 진이 빠졌다. 일대일 수업이라 강사 ‘댄’이 시연을 마치면 곧바로 실습을 해야 했다. 댄의 영어 설명은 머릿속을 거쳐 파도처럼 밀려갔다. 호흡과 부력을 유지하기도 힘든 물속에서 배워야 할 것은 왜 그리 많은지. 매 끼니를 2인분씩 비워 냈다.
그렇게 나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티오만섬에서 ‘실미도’ 특수부대의 심정으로 2박3일을 훈련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섬을 떠나려면 오픈워터 실습을 마쳐야 했다. 최대 수심 18m 해역까지 배를 타고 나가 그동안 익힌 기술을 실습하는 과정이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배운 대로 입수했고, 익힌 대로 하강했다. 바닥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문제가 터졌다. 계속 내려가면 발아래 펼쳐진 산호초를 내 발로 뭉개 버릴 것 같았다. 몸을 띄우려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상하게도 몸은 계속 가라앉는 듯했다. 다급한 마음에 발을 저어 산호초 더미에서 벗어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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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빙 핀(오리발)을 차고 발을 저은 것은 악수였다. 수평을 유지해야 할 몸이 45도로 기울며 솟구치기 시작했다. 부력조절기(BCD)에서 공기를 빼내 하강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더듬어도 공기 배출 밸브 줄이 잡히지 않았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호흡이 가빠지며 공포가 밀려왔다. 이대로 올라가면 안전정지(다이빙 후 수심 5m에서 3분간 머물며 체내 질소를 천천히 배출하는 과정)도 못한 채 수면으로 떠오를 듯했다. 교육 때 들은 감압병 위험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였다. 앞에 있던 댄이 뒤를 돌아보며 “괜찮으냐?”는 수신호를 보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문제가 있다”는 수신호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손만 마구 휘저었다. 다행히 노련한 댄은 내 상태를 단숨에 파악했다. 내 손을 꼭 잡고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호흡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실습 내내 엄격하기만 했던 강사였다. 그런 그가 물속에서 위기에 처한 나를 안정시켜 줬다. 댄의 신호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자 서서히 부력과 균형이 돌아왔다. 가까스로 되찾은 균형을 잃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는 사이 40여분간의 첫 오픈워터 실습이 마무리됐다.
휴식 후 이어질 2차 실습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방금 겪은 공포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댄, 나는 더 이상 못할 것 같아.” 댄은 아무 말 없이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내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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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말을 못 들었나. 왜 이렇게 무심해?’ 얼떨결에 받아먹은 과자처럼 달콤했던 1시간 휴식이 끝났다.
나는 ‘흥, 내가 못할 줄 알고?’라며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 그런데 1차 때와 달랐다. 이날은 수중 시야가 좋지 않다고 했지만, 수면을 뚫고 빛내림이 쏟아지는 구간에서 본 물고기 떼의 유영은 환상적이었다. 바다거북을 만났을 때는 어찌나 신이 나던지, 그 뒤를 한없이 따라가고 싶었다. 초원을 질주하는 기차에 힘찬 엔진 소리가 있다면, 산호초와 물고기 사이를 미끄러지는 내게는 호흡기의 “쉬익, 쉬익” 소리가 있었다.
다이빙을 마치고 배 위로 올라왔을 때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2박3일 동안 수없이 포기하려 했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끝까지 해냈다는 뿌듯함과 ‘이걸 왜 이리 유난스럽게 마쳤을까’ 하는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동시에 나를 묵묵히 지켜준 댄을 향한 고마움이 몰려왔다.
그날 이후 나는 스쿠버다이빙을 하지 않았다. 배운 기술을 모두 잊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티오만에서 얻은 진정한 배움은 다이빙 기술이 아니다. 지난 47년간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을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쉽게 포기하는 사람인지 알게 됐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다. ‘배우는 여행’을 결심했던 나는, 그렇게 오늘도 지구 한쪽에서 나에 대해 배우고 있다.
티오만섬(말레이시아)=글·사진 이영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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