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박레프’로 살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얼어붙을 것 같은 맨바닥을 맨발로 걷던 어린 자신의 모습이 첫 기억이었다. 여전히 한국에 와보지 못한 외할머니 박셰가이리디야(78)는 “정말 배고프고 추웠다. 갈대밭밖에 없는 곳에 내렸다”고 기억한다. 서울문화재단 광복 81주년 기념 연극 ‘극장은 달린다’(오세혁 작, 변영진 연출)의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이하 우즈베크), 카자흐스탄(카자흐) 순회 공연에 ‘아기 엄마’ 역할로 참여하는 우즈베크 고려인 4세 이사샤(32) 배우에겐 이 공연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길을 따라가는 일”이다.
러시아 연해주 신한촌에서 강제 이주 열차에 짐짝처럼 실린 한인 예술가들은 그 안에서도 공연을 계속했다. 1932년 창단 이후 94년간 역사를 이어온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인 예술 단체 카자흐 ‘고려극장’의 시작이다. 이사샤씨는 이 공연에서 열차 안 공연을 지켜보는 ‘아기 엄마’ 역할이다. 그는 “아기를 안고 연기할 때면 우리 할머니도 이 아기처럼 안긴 채 우즈베키스탄으로 왔겠구나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이사샤씨는 극중에서 유창한 영어와 러시아어 대사는 물론, 우즈베크·타지크·카자흐·키르기스어에 한국어까지 다섯 나라 말로 춘향가 한 자락을 멋지게 뽑는다.
광복 81주년 기념극 ‘극장은 달린다’의 중앙아시아 순회 공연 출국 전날인 14일, 서울 대학로극장 쿼드 공연 뒤 만난 고려인 4세 배우 이사샤씨는 “광복을 기념하는 고려인 역사에 대한 공연에 참여하게 돼 가슴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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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나는 완전히 한국인’이란 걸 느낀다”고 했다. /이태훈 기자
공연 ‘극장은 달린다’는 일제강。기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당한 중앙아시아를 거쳐 오늘날의 서울까지 시공간을 이동한다. 조국을 잃고 혹한과 굶주림 속에서도 끝내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던 한인들의 여정을 마당극 형식에 담았다. 올해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을 받은 극단 불의전차 대표 변영진이 연출을, 지금 가장 각광받는 극작·연출가 중 한 명인 오세혁이 극작을 맡았다. 워낙 젊은 에너지가 넘치는 창작진의 조합 덕에 서글프고 애달픈 얘기를 다루면서도 끊임없이 관객을 웃게 한다.
이사샤씨는 어릴 때부터 우즈베키스탄 한인 동포들 사이에선 유명한 가수였다. 외국어를 외우듯 한국말을 외워 한국 노래를 주로 불렀다. 중학교 때부터는 현지 세종학당을 다니며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웠고, 고등학교 때 한국 대사관 소개로 한국 유학을 결심했다. 대경대 졸업 후 올해 초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그는 “외동딸이지만 부모님은 ‘네 꿈을 펼치라’고 늘 지지해주신다. 원래 외향적 성격이라 어딜 가든 잘 섞여서 타향살이 외로움 같은 건 전혀 없었다”며 웃었다.
공산권 붕괴 이후 태어난 그에게 조국은 그냥 한국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은 다양한 민족이 살기 때문에 각자 나는 우즈베크 사람, 나는 카자흐 사람 식으로 스스로를 인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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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집에서 한국 음식을 먹으며 자랐고, 늘 ‘나는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열 살 때 한 축제에 가수로 초대를 받아서 처음 한국에 왔고, TV 예능에 출연해 가수 정수라와 ‘아! 대한민국’을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는 오히려 “처음 한국에 유학 왔을 때 자신을 부르는 ‘고려인’이라는 말이 충격이었다”고 했다. “그 때는 ‘나는 한국인인데 왜 날 고려인이라고 부르지? 한국인과 다른 건가?’ 그런 생각도 했어요. 최초의 정체성 혼란이랄까요, 하하.”
학업과 가수 활동을 병행하다, 연기에 흥미를 느껴 한예종에 진학했다. ‘극장은 달린다’ 오디션도 한예종 동기의 소개로 도전했다. 그는 “고려인 예술가의 삶은 저와 가까운 주제였고, 비극적 이주 역사를 춤과 노래로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는 .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근데 합격한 거예요! 경쟁률이 500대1이 넘었다는 걸 기사 보고 알았어요.”
‘극장은 달린다’ 공연에서 중앙아시아 이주 고려인 여인을 연기하는 이사샤 배우. /서울문화재단
그는 “극중 역할이 한국말을 잘 못 하지만 한국 노래를 배우는 고려인이라 더 마음에 들었다. 한국 전통 예술 공연을 보면 언어를 잘 몰라도 깊이 와닿는 게 있는데, 극중에서 한국 문화와 전통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도 감동적이었다”고도 했다.
이사샤씨와 ‘극장은 달린다’ 팀은 19일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23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공연을 마쳤고, 27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공연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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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진 연출은 “키르기스스탄에선 한인보다 현지인 관객이 더 많아 보였고, 우즈베키스탄에선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섞어 쓰는 고려인 2~3세 400분이 오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엄청 몰입하고 정말 많이 우시더라”고 했다. “극 중 심청전이나 춘향전 장면에선 3세 어머니가 2세 할머니에게 ‘저게 춘향전이야?’ 속삭이며 물으시더군요. 여기까지 와서 자신들 얘기를 공연해 줘 고맙다는 인사에 뭉클했습니다.”
배우 이사샤(가운데)씨가 '극장은 달린다' 공연에서 아기를 안은 채 강제 이주 열차에 태워진 한인 여성 '아기 엄마'를 연기하고 있다./서울문화재단
이사샤씨는 카자흐스탄에서 메신저를 통해 “딸이 배우로 무대에 서는 모습을 처음 보신 부모님이 ‘놀라웠다’ ‘정말 재미있게 봤다’고 해주셔서 뿌듯했다”며 “친구들도 좋아했는데, 특히 고려인 친구들은 연극을 통해 자신의 역사와 이야기를 배울 수 있어서 더 좋아했다”고 말했다. “고려인이 아닌 친구들은 고려인의 역사를 연극으로 처음 접하며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어요. 공연 뒤 ‘고려인분들이 더 존경스러워 보인다, 감동적이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실제 고려인 분들 앞에서 공연하며 조금 더 특별한 감정이 들었고, 그분들이 직접 살아온 역사와 연결된 이야기를 그분들 앞에서 연기한다는 생각에 감정이 더 깊어지고 공연하면서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이사샤씨에게 광복이란 “이렇게 한국에 와서 한국인으로서 한국 배우들과 우리 모두의 역사를 담은 이야기를 공연할 수 있게 해 준 날”이다. “광복절을 기념하는 고려인 역사에 대한 공연에 제가 참여한 게 가슴 뿌듯해요. 또 한 번 ‘나는 완전히 한국인이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공연하면서 울컥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