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국내 증시는 큰 폭의 조정을 겪었다. 개인 투자자 뿐만 아니라 대부분 자산운용사의 대표 펀드들도 큰 손실을 입었다. 시장이 하락할 때 오히려 더 빛나는 운용사와 펀드매니저도 있다. 매경플러스가 ‘한국의 위대한 투자자’ 시리즈 여섯번째 주인공으로 김우기 더블유자산운용 대표(57)를 선택한 이유다.
김우기 대표는 국내 자산운용업계에서 찾기 힘든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스타 펀드매니저나 애널리스트 출신이 아니다. 증권사 프라이빗뱅커(PB)로 20년간 고액자산가의 돈을 직접 관리하다가 펀드매니저로 변신했다.
PB 출신이기에 그는 다른 어떤 펀드매니저들보다 고객의 마음을 잘 읽는다. “거액 자산가들은 항상 최대 수익률만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를 때 조금 덜 수익을 내더라도 떨어질 때도 수익을 내거나 손실을 최대한 줄이길 원합니다.”
실제 2016년 설립된 더블유자산운용은 지난 10년간 코스피 대비 변동성은 훨씬 낮으면서, 연평균 10%포인트 이상 높은 수익률을 기록해왔다. 2019년 4월 17일 설정된 대표 펀드 ‘W1000’은 약 7년 4개월 동안 누적수익률 510.6%(2026년 8월 12일 종가 기준)를 기록해, 같은 기간 코스피 상승률 192.6%를 크게 웃돌았다.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 등 대형 증권사들이 최근 개최한 ‘우수 자산운용사·투자자문사’ 협력 행사에 더블유자산운용이 빠짐없이 초청된 이유다.
“노력한 결과가 숫자로 나온다는 게 투자의 매력”
1969년생인 김우기는 평생 사업을 한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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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부터 언젠가는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한국외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유독 재무와 투자 관련 수업에 흥미를 느꼈다. 숫자를 다루는 투자 관련 과목에서는 좋은 성적을 받았고, 4학년 때 투자론을 가르치던 학과장 교수로부터 “증권회사 체질인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1994년 럭키증권에 입사했다. 회사 이름은 이후 LG증권, LG투자증권, 우리투자증권, NH투자증권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20년간 한 직장에서 증권업과 주식투자를 익혔다.
“이 일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주 명확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해서 투자하면 결과를 시장이 숫자로 보여주잖아요. 누가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숫자가 나오고, 그 결과는 내가 책임지면 됩니다. 그게 굉장히 깔끔하다고 느꼈습니다.”
김우기식 투자법이 처음부터 완성돼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투자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전환.은 2009년 기업 탐방 경험이었다.
당시 기업금융(IB) 부서에서 기업과 관계를 관리하는 RM 업무를 처음 맡게 된 그는 업무 특성상 수많은 기업을 직접 찾아다녔다. 이미 10년 넘게 주식을 해온 그에게 기업 방문은 。차 단순한 영업이 아니라 ‘기업 탐방’으로 바뀌었다.
먼저 기업의 숫자를 분석해 후보를 찾고, 실제 회사를 방문해 경영진을 만나 숫자로는 드러나지 않는 정성적인 정보를 확인했다. 필요하면 경쟁사나 밸류체인 기업까지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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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발굴한 종목에 투자했더니 이전과 다른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메디톡스와 씨젠, 한스바이오메드 등 당시 시장에서 크게 주목받지 않던 중소형 성장주를 초기에 발굴했다. 고객 계좌를 열면 10여 개 종목 가운데 수익률 200%, 400%, 600%를 기록한 종목이 여러 개씩 들어 있을 정도였다.
이 경험이 김 대표에게 “나는 주식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잘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자신의 투자 스타일에 이름을 붙였다. ‘디테일 드리븐 인베스트먼트(Detail Driven Investment)’가 그것이다.
기업을 가치주냐 성장주냐로 먼저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숫자의 작은 변화까지 살피고, 직접 기업을 찾아가고, 관련 산업과 경쟁사를 파고들면서 좋은 기업의 성장 기울기가 가팔라지기 시작하는 초기 시。을 찾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IMF 때 ‘깡통계좌’ 경험, 현금비중 중요성을 깨닫다
더블유자산운용이 다른 자산운용사와 차별화되는 운용상 특징은 ‘현금 비중’ 조절을 매우 적극적으로 한다는 。이다.
김우기가 현금 비중 조절 전략의 필요성을 몸소 깨달은 것은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그는 20대 후반의 젊은 PB였다. 시장 경험이 많지 않았던 데다 겁도 없었다. 고객과 지인 자금에 레버리지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시장이 무너지자 결과는 참혹했다.
“흔히 말하는 깡통 계좌가 생겼습니다. 빚까지 생겼죠. 그때 정말 입술이 위아래로 다 부르틀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실패가 이후 30년 투자 인생을 지탱한 두 가지 원칙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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