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는 그 동네가 살아온 방식이 새겨져 있다. 낮은 담과 굽은 길, 오래된 가게와 사람들의 발자국이 이어진 그 곳에는 한 지역의 시간과 생활문화가 나이테처럼 둥글게 쌓여 있다. ‘골목별곡-걷고, 만나고, 기억하는 강원의 골목' 시리즈는 강원지역 곳곳의 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그 형태와 빛, 소리, 냄새, 사람의 흔적을 기록한다. 낡은 공간, 사라져가는 풍경을 애써 붙잡으려 하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과 관계를 통해 골목을 지역의 삶이 만든 문화적 자산으로 다시 바라보려고 한다. 【편집자주】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날에는 춘천에 갈 일이다.
약사동 망대에 오르기 전
기대슈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늙은 햇살에게
흘러간 길을 묻고 문득 해몽을 들을 일이다."
십수년 전 춘천에서 열린 어느 낭송회에서 김정수 시인이 읊조리던 시(詩) ‘망대’. 그 처연한 문장을 품고 춘천 약사동?망대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골목에는 길의 폭이나 길이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들이 쌓여 있다. 거기는 세월의 풍파와 그 안을 살아낸 사람들의 숨결이 켜켜이? 내려앉아 마침내 한 시대의 삶을 고스란히 그려낸 풍경화 같은 곳이다. 날카로운 직선과 속도로 대변되는 초고층 아파트 군락이 원도심의 스카이라인을 조각하는 시대, 우리는 가장 느리고 굽은 선으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있는 망대골목의 입구에 섰다.
시인의 문장을 따라 도착한 삼거리 모퉁이에서 여행자는 뼈아픈 시대의 아이러니와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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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십여 년 넘게 망대골목의 어귀를 터줏대감처럼 지키던 ‘기대슈퍼’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중앙시장 상인들이 통행금지를 피해 산비탈에 판자촌을 이루며 형성된 이 가난한 산동네에서 “가진 것 없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끼리 서로 기대며 살자”는 뜻으로 붙였던 이름이었다.
가파른 골목을 오르기 전 순례자들이 물 한 병으로 갈증을 달래고, 노인들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담배 한 개비에 시름을 덜어내던 그 마음의 안식처. “다 스러져 가는 동네에 무얼 볼 게 있다고 찾아오느냐”며 쓸쓸히 웃던 주인 할아버지의 말처럼, ‘서로 기대어 살자’던 다정한 약속의 공간마저 거대한 도시 개발과 쇠락의 바람 앞에서는 끝내 기댈 곳을 찾지 못한 채 사진 속 기억으로만 남았다.
상실감이 내려앉은 공간을 뒤로하고, 망대길을 향해 하늘로 뻗어 올라간 골목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골목은 여전히 스스로의 몸을 낮추고 구부리며 그 시절의 표정을 온몸으로 붙들고 있었다.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바깥세상의 시간은 스르륵 사라진다. 어른 한 명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길이다.
양팔을 벌리면 손끝이 양쪽의 낡은 벽돌과 시멘트 담장에 닿을 듯하고, 마주 오는 이라도 만나면 둘 중 하나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옆으로 비켜서야만 비로소 통행이 허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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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하고 편리한 공간만을 추구하던 도시의 문법은 이 비좁은 '틈새’에서 무력해진다. 바닥에 구르는 깨진 돌들과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벽면이 보행자의 걸음을 자연스레 늦춘다. 빠르게 걸을 수 없는 길 위에서, 비로소 공간의 농밀한 표정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골목의 ‘인상’을 가장 먼저 규정하는 것은 ‘불규칙성’과 ‘곡선’의 건축학이다. 길은 가파른 경사를 따라 이어지며 숱한 시멘트 계단을 만들어내는데, 그 높이와 폭, 진행 방향이 온통 제각각이다. 짧은 박자로 급하게 치고 올라가다가는 순식간에 끊어지고, 다시 비스듬한 경사로와 나란히 이어진다. 도면 위에서 자로 재듯 일괄적으로 재단한 길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집이 들어서고 삶이 덧대어질 때마다 그때그때의 형편에 맞춰 만들어진 까닭이다.
가지치기를 하거나 순환하는 고릿길 없이 외줄기로 뻗어 있지만, 그 단조로움을 깨뜨리는 것은 90도로 급격히 꺾어지는 구불거림이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시야가 극적으로 차단되고 다시 열리는 오밀조밀한 입체감이 걸음마다 일정한 리듬을 준다. 어느 구간에 이르면 혼자 걸어도 옷자락이 담벼락에 스칠 만큼 폭이 더욱 좁아지는데, 그 스침 속에서 낯선 타인들은 결국 이웃이 되고 인연이 됐다.
고개를 들면 골목의 천장을 메운 지붕들의 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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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비처럼 다닥다닥 어깨를 맞대고 머리를 잇댄 낡은 기와지붕과 슬레이트 지붕들은, 비록 기대슈퍼는 사라졌어도 여전히 서로에게 기대어 버티고 있는 이 동네의 숙명을 그대로 빼닮았다.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산동네 가옥의 전형을 보여주는 돌출된 차양이다. 지붕 처마 끝에서 대문 위까지 길게 이어져 나온 플라스틱 차양들은 가을 햇살을 머금고 투명한 노란빛으로 반짝인다.
무채색의 시멘트 담장과 그 위에 엉킨 녹슨 철조망이 자칫 골목을 잿빛의 적막 속에 가둘 법도 하지만, 골목의 표정은 결코 어둡지 않다.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넝쿨과 아무렇지 않게 피어난 붉은 꽃, 담장 아래 주민들이 정성껏 줄지어 내놓은 오색의 화분들, 그리고 세월의 흔적 위로 덧칠해진 초록색과 파란색 철제 대문들이 잿빛 도화지 위에 생생한 색채의 변주를 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골목 특유의 날카로운 음영 대비가 공간의 깊이를 완성한다. 햇살이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게 부서져 담벼락에 박히는가 하면, 처마 밑과 꺾어진 골목 그늘은 깊은 먹빛으로 그라데이션되며 시나브로 가라앉는다. 열린 문틈으로 언뜻 보이는 빈집의 멈춘 시계와 어느해 달력 그리고 골목을 지켜온 노부부의 집 창문 너머로 간간이 새어 나오는 도란거리는 소리가 교차하며 골목은 쓸쓸함과 정겨움이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드러낸다. 달콤 쌉싸름한 느낌이다.
가파른 계단의 끝, 소나무 뿌리처럼 뻗어 나간 골목길의 정.에 이르면 다닥다닥 붙은 기와지붕 너머로 섬처럼 떠 있는 3층짜리 하얀 건물과 마주하게 된다. 마을 이름의 기원이 된 ‘망대(望臺)’다. (계속)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협찬으로 제작됐습니다.
겨져 있다. 낮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