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서울의 한 백화.에서 화장품 매장 직원이 테스트용 제품을 준비하고 있다. 이날 한 매장에서 만난 김아무개 백화.면세.판매서비스노조 조합원은 “온라인과 매장의 가격 차이가 크다 보니 손님들이 매장에서 색상 테스트 서비스만 이용하고 가는 경우가 많아 속상하다”고 말했다. 김영원 기자
“각종 스킨케어와 마사지를 다 해드리지만 정작 물건은 못 팔아요. 대부분 온라인에서 구매하시니까요.”
서울 시내 면세.의 화장품 매장에서 25년째일하는 김세현(가명)씨는 요즘 자주 허탈함을 느낀다. 매장을 찾는 손님에게 스킨케어부터 손·어깨 마사지, 두피 마사지까지 제공하지만 매출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어서다. 본사는 온라인 매출을 늘린다며 온라인 할인 폭을 높이고, 재고와 증정용 샘플까지 온라인에 더 많이 할당한다. 이 때문에 손님을 정성껏 응대한 뒤에도 물량이 없거나 가격 차이가 커 손님에게 “온라인에서 사시라”고 이야기해야 할 때도 있다. 김씨는 회사의 프로모션 정책에 따라 손님에게 온라인 회원 가입도 독려해야 하는데, 이렇게 회원이 된 손님에게 회사는 각종 온라인몰 전용 할인쿠폰을 뿌린다. 하지만 김씨의 성과는 오로지 매장 매출로만 평가받기 때문에, 정성스러운 응대는 자신의 일자리를 위태롭게 만든다. 자신의 노동이 존립 기반을 잠식해가는 ‘잠식 노동’이 지금 백화。·면세。 화장품 판매노동자가 마주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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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백화。면세。화장품판매서비스노동조합(백면노조)이 연세대 산업보건연구소 윤진하 교수 연구팀(윤진하·이원태·변재욱)과 함께 실시한 ‘판매노동자 근무환경 및 건강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945명 가운데 72%가 ‘매장에서 화장품 시연·체험만 하고 온라인에서 구매하는 손님을 응대하는 데 전체 업무시간의 15% 이상을 쓴다’고 답했다.
온라인 판매를 뒷받침하는 노동이 늘어날수록 고용불안도 커졌다. 응답자의 53.4%는 ‘내 매장이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고 답했다. 41.5%는 ‘내 업무의 일부가 내 일자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인식했다. 온라인 구매 손님을 응대하는 업무가 절반을 넘는 집단에서는 이 비율이 각각 78%, 76.3%로 치솟았다.
이번 조사는 2018년 김승섭 당시 고려대 교수 연구팀의 조사 후 8년 만에 이뤄진 대규모 판매직 실태조사다. 윤 교수는 “8년 전 조사가 신체적 근무환경에 초.을 뒀다면 이번 조사에선 온라인 전환, 자동화 평가가 고용불안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들의 정신적 건강 상태는 다른 집단에 견줘 취약했다. 즐거움·평온함·활력 등 긍정적인 심리 상태를 통해 ‘정신적 안녕감’(WHO-5)을 측정하는 세계보건기구의 척도에서 조사 대상 노동자들의 평균.수는 100。 만。에 46.2。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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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근로환경조사(KWCS)의 소매업 매장 판매직 여성 평균(60.6.)은 물론 전체 임금노동자 평균(59.6。)에도 크게 못 미치는 수치다. ‘평균 50。 이하’는 우울 증상에 추가 평가가 필요한 기준。인데, 이번 조사에서 ‘50. 이하’인 비율은 54.2%로 응답자의 절반을 넘었다. 소매업 매장 판매직 여성과 전체 임금노동자(각 29.6%)보다 약 1.8배 많은 수준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제품 리뷰와 함께 ‘외모 평가’가 떠돌아다니기 일쑤라는 .도 이들의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요소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이 방문하는 면세。일수록 영상 촬영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때문에 일부 노동자들은 마스크를 끼고 일하기도 한다. 김씨는 “인플루언서들이 매장에 와서 라이브 방송을 하고 제품 소개를 하면서 우리 얼굴까지 찍는다. ‘찍지 말라’고 항의하거나 ‘사진·영상을 지워달라’고 요구해봐도 소용이 없다”며 “회사에선 아무런 조치를 안 하는데, 왜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이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돌아다녀야 하는지 속상하다”고 했다.
화장품 매장의 운영과 평가가 알고리즘으로 자동화되면서 판매노동자들은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매장 판매직의 전문성은 결국 손님의 피부·화장 관련 고민을 들은 뒤 자신의 노하우를 토대로 적절한 제품을 추천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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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매장 특성에 맞춰, 잘 팔리는 제품을 골라 전시하는 일종의 ‘엠디’(MD) 역할을 하는 것도 원래는 이들 몫이었다. 하지만 알고리즘으로 이런 일의 대부분이 자동화됐다. 이번 조사에서 “업무에 앱, 알고리즘 등 자동화된 시스템을 사용한다”는 응답은 49.2%였고, 응답자 3명 가운데 1명(34.8%)은 “시스템의 지시나 평가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거부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서울 시내 한 백화. 화장품 매장에서 21년째 일하는 최희수(가명)씨는 “예전에는 고객의 필요에 맞춰 제품을 추천하면서 머리를 짜내고 공부하는 재미가 있었다. 더 열심히 설명하고 싶다, 더 잘 대응하고 싶다며 직원들끼리 격려도 했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는 “수동적인 존재가 됐다는 무력감이 크다”며 “이렇게 일하다 보면 결국 오프라인 매장에도 자판기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다. 내 일도, 곧 필요 없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백면노조는 이런 ‘잠식 노동’에 대응하기 위해 올해 산별 단체교섭에서 온오프라인 매출 실적 등 주요 영업지표를 노조에 제공하라고 요구해, 이런 내용을 단체협약에 담기로 합의한 상태다. 이서영 백면노조 사무처장은 “회사가 온오프라인 채널에 각각 자원을 얼마나 투여하는지, 매출은 얼마나 나오는지 지금까지는 노조가 전혀 알 수 없었다”며 “매장 매출만으로 판매노동자의 성과를 평가하는 구조를 개선하고, 온라인 판매 확대가 향후 인력 감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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