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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6-10-3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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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마수운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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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9월이면 벌써 쌀쌀한데요.” 호 반 비 씨(43)가 낡은 선풍기 머리를 〈시사IN〉 취재진 쪽으로 돌리며 멋쩍게 웃었다. 9월에도 베트남 중부 응에안성 빈록의 한낮 기온은 40℃에 육박했다. 후덥지근한 열기 탓에 선풍기 바람은 더운 공기와 공사장 먼지를 어지럽게 흩뿌렸다. 바닷가 마을 골목에서는 시멘트 가루가 날렸다. 그의 집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비 씨가 설계도를 조심스레 펼쳐 보였다.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에는 방이 네 개, 거실이 두 개, 화장실도 두 개다. “베트남 기준으로 보면 넓은 집이다. 아마 마을에서 제일 넓을 것이다.” 호 반 비 씨가 공사 중인 이층집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시사IN 김세욱 공사비는 우리 돈으로 약 1억원. 청춘을 한국에서 보내며 모은 돈으로 그는 집부터 지었다. “꿈이었다. 예전엔 생각도 못했는데, 이제는 돈이 있다.” 그러나 집을 지은 뒤 무엇으로 먹고살지는 아직 모른다. 올해 3월 귀국한 비 씨는 6개월째 직업이 없다. 집이 올라가는 과정을 매일 지켜보는 것이 그의 유일한 일과다. 호 반 비 씨는 다시 기회가 온다면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시사IN 김세욱 한국으로 떠나기 전, 비 씨는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았다. “이 동네는 다들 서로 권유해서 외국으로 돈 벌러 간다. 가족 살림을 위해서다.” 동네 사람들과 같이 비 씨도 한국행을 준비했다. 2011년, 한국어능력시험(EPS-TOPIK)을 통과한 그는 충남 서산에 있는 한 제조업 공장에 배정됐다. 한 달을 꽉 채워 일하고 하루 손에 쥔 월급은 200만원 안팎. 그는 첫 직장을 따뜻하게 기억했다. “힘들었다. 그래도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쉬는 시간이 있고, 보험도 있었다. 베트남보다 더 안전하기도 했다.” 그는 사업장을 한 번도 이탈하지 않고 4년 10개월 만기를 꽉 채운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 3년 동안 그는 철제 창문과 공사장 칸막이를 용접하는 일로 근근이 살았다. “처음엔 한국으로 다시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일이 없어) 집에 오래 있다 보니 친구들이 같이 가자고 권해서, 그럼 가보자 한 거다.” 그렇게 다시 한국행을 택한 뒤 올해 3월 귀국했다. 그의 스마트폰 사진첩에는 한국에서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평택에서 본 하얀 눈, 대전에서 찍은 꽃, 그리고 샛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길. 액정을 쓸어내리던 비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은행나무, 진짜 예쁘네.” 경기도 평택 공사장에서 일할 때의 사진을 보여주는 비 씨. ⓒ시사IN 김세욱 베트남의 한국 마을 응에안성의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한쪽으로는 넓은 바다가, 반대쪽으로는 산자락이 따라붙는다. 거대한 원기둥을 세운 2층 저택, 붉은 기와지붕을 얹은 유럽풍 건물이 줄지어 서 있다. 〈시사IN〉이 베트남 중부에서 만난 귀환노동자 대부분은 한국에서 번 10억~30억 동(약 5000만~1억5000만원)을 이런 집을 짓는 데 쏟아부었다. 그러나 대낮의 마을은 기이할 정도로 적막했다. 정작 이 집들을 지어 올린 20~40대 청년들은 마을에 없었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고향을 두고 청년들은 ‘돈 때문에’ 마을을 떠났다. 응에안에서 차로 1시간쯤 걸리는 또 다른 바닷가 마을, 하띤성 꼬담에 살고 있는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이 동네는 열에 아홉이 한국에 다녀왔거나 지금 가 있다. 한국에 가 일하지 않은 집은 마을에서 저런 큰 집을 지을 엄두조차 못 낸다.” 응에안성 빈록에 있는 2층 저택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집을 짓는다고 설명한다. ⓒ시사IN 김세욱 이곳에서 만난 호앙 티 리엔 씨(34)도 대리석으로 장식된 2층 집을 지었다. 리엔 씨 부부가 한국에서 일하며 꼬박꼬박 송금한 20억 동(약 1억원)으로 지어 올린 집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 안 곳곳에서 ‘한국’이 쏟아져 나왔다. 모바일 야마토3게임 찬장에는 신라면과 쌈장·김 가루가 채워져 있고, 냉장고 문을 열자 한국의 커피 가루와 홍삼이 빼곡했다. 다용도실의 대형 세탁기도 한국에서 들여온 최신형 가전이었다. 리엔 씨는 2015년 고용허가제(EPS)를 통해 경북 구미의 휴대전화 부품 공장에 들어갔다. 베트남에서부터 사귀던 남자 친구도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 일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고 받은 첫 월급은 120만원. 둘은 한국에서 결혼하고 첫아이도 한국에서 낳았다. 리엔 씨 부부는 2021년 베트남으로 돌아와 둘째를 낳았다. 이후 두 아이를 부모에게 맡긴 뒤 다시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으로 갔다. 경기 안산의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4년 넘게 일하며 둘이서 한 달 32만원짜리 원룸에 살았다. 잔업이 있는 날은 밤 9시까지 일했다. 올해 7월, 리엔 씨 부부는 11년 만에 고향에 완전히 돌아왔다. 올해 7월 한국에서 11년 만에 돌아온 리엔 씨. ⓒ시사IN 김세욱 꼬담 마을에서 한국은 바다 건너 타국이 아니라 익숙한 일터다. 쩐 티 늉 씨(43)는 2005년 먼저 타이완으로 떠나, 휴대전화 부품 공장에서일했다. 이후 2008년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갔다. 숙식 공제 등을 따져보니 급여가 타이완보다 훨씬 많았다. 늉 씨는 먼저 한국에 가 있던 남자 친구와 대구의 ‘신라웨딩홀’에서 베트남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석을 가득 채운 손님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고향 마을 사람들이었다. “대구에 우리 마을 사람이 엄청 많아서 대구에서 결혼했다.” 늉 씨는 그날의 결혼사진과 함께, 복을 부른다며 한국에서 가져온 지폐 몇 장을 간직하고 있었다. 응에안성 고용서비스센터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서 일하는 응에안 출신 노동자는 약 1만7000명이다. 2023년부터 최근까지 고용허가제 시험에 등록한 응에안성 인원은 연인원 1만6335명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현재 고용허가제 비자로 국내 체류하는 베트남 노동자는 4만5141명이다(2026년 7월31일). 응에안성 내에 한국에 간 사람이 특히 많은 마을이 있느냐는 질문에 비 응옥 꾸인 응에안성 내무국 부국장은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어느 한 마을을 꼽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해외에, 특히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많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딸의 재롱을 보고 있는 쩐 티 늉 씨(오른쪽) 모습. ⓒ시사IN 전다현 전 티 늉 씨는 현재 뉴질랜드로 일하러 간 남편과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시사IN 김세욱 중부는 여전히 한국을 간다 한국은 베트남 노동자들이 선호하는 외국 일터 중 1순위로 꼽히지만, 한국행을 원하는 베트남 사람이 예전만큼 많은 것은 아니다. 하노이에 있는 한국산업인력공단 EPS센터 이태형 센터장은 “예전에는 지원을 많이 했는데 조금씩 줄고 있다”라고 말했다. 올해 베트남 제조업 분야는 3000명 모집에 8600명가량 지원했다. 1차 한국어시험 커트라인도 예전엔 80。을 넘겼지만 올해는 75。 안팎으로 내려왔다. 베트남도 달라지고 있다. 주베트남 한국 대사관에 따르면 베트남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5000달러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까지 올라왔고, 정부는 1만 달러를 목표로 국내 산업을 키우는 데 힘을 싣고 있다. 그러나 중부는 사정이 다르다. 이태형 센터장은 “북부 하노이나 남부 호찌민은 인근에 한국 기업을 비롯해 회사가 많은데, 중부는 그렇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없다”라고 말했다. 지원자들 중 응에안성 같은 중부 지방 출신이 가장 많은 까닭이다. 아시아 이주노동자를 연구해온 호앙 란 아인 호주 멜버른 대학 개발학 교수도 같은 변화를 짚었다. “예전에는 주로 북부와 중부 사람들이 외국으로 갔다. 그런데 북부에 。. 기회가 생기자 이제 북부에서 떠나는 사람은 적고, 주로 중부 사람들이 떠난다. 인터넷바다이야기 최근 2년 동안 일본에서 현장 연구를 했는데, 새로 도착한 사람 대부분이 중부 출신이었다. 다국적기업이 많이 들어온 북부와 남부에서 해외 이주는 더 이상 가장 바람직한 전략이 아니다. 반면 중부는 여전히 자원이 부족하고 재해가 잦은 지역이다”라고 설명했다. 한국행을 원하는 이들은 주로 농업이나 어업을 하던 사람들이다. 기후위기도 이들에게 한국행을 부추겼다. 빈록 마을의 한 주민은 “우리 고향 사람들은 계속 배를 타는데 날씨가 변해 물고기가 많이 없다”라고 설명했다. 비 응옥 꾸인 응에안성 내무국 부국장은 응에안의 많은 노동자가 한국행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시사IN 김세욱 일을 하려면 멀리 떠나야 한다. 꾸인 부국장은 응에안 노동자 90만명 가까이가 고향을 떠나서 일한다고 설명했다. 응에안성은 외국인 투자 기업을 유치해 고향에서 일할 자리를 만드는 것을 첫 번째 전략으로, 해외 송출을 두 번째 선택지로 삼고 있다. 아인 교수는 “가난한 농촌, 특히 중부에서 해외 이주는 인생을 바꿀 기회”라고 했다. 이주하지 않고는 아이 교육비나 집, 만일에 대비한 저축을 할 만큼 큰돈을 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가족이 아프거나 집을 지어야 할 때도 사람들은 빚을 진다. 그 빚을 갚으려고 떠나고, 떠나기 위해 또 빚을 진다. 이 선택지 가운데 가장 선호도가 높은 곳이 한국이다. “한국은 이주 관리가 다른 나라보다 체계적이라서 착취나 학대 위험이 낮고, 최저임금 덕분에 임금도 어느 나라보다 높다. 사람들은 한국에 가는 데 실패했을 때만 다른 나라로 간다.” 그는 베트남 노동자들이 일본이나 타이완보다 한국을 훨씬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노동환경이나 문화는 비슷하지만, 한국행이 모을 수 있는 돈이 가장 많다는 설명이다. 아인 교수는 “급여 자체는 비슷하지만, 일본이나 타이완은 숙식비를 부담하는 비율이 훨씬 높다. 중개수수료와 교통비 같은 이주 비용을 떼고 나면 계약이 끝난 후 모을 수 있는 돈이 아주 적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가 처음 계약기간을 빚 갚는 데 쓴다. 일본에서 만난 노동자들도 일본 다음엔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라고 말했다. 1990년대 산업연수생제도 시절과 비교하면 사정은 그나마 나아졌다. 2004년 도입된 고용허가제는 정부 간 협약(MOU)에 따라 양국 공공기관이 선발과 송출을 맡는다. 송출회사가 수수료와 보증금을 떼던 연수생제도와 달리 비용이 정해져 있다. 체불 임금을 받아낼 공적 창구도 생겼다. 응에안성 출신 까오 ? 하오 씨(42)가 2008년 1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때 해외노동센터(COLAB)에 낸 비용은 630달러(약 85만원)였다. 한국어학원 수강료와 건강검진비로 든 400만 동(약 20만원)을 합쳐도 큰 빚을 질 액수는 아니었다. 2010년 통영 어업 현장으로 떠난 하띤성 출신 쩐 훙 씨(40)도 630달러를 냈다. 하오 씨의 첫 일터는 대구의 자동차 부품 공장이었다. 주야 12시간씩 교대로 일했지만 80만원 남짓한 월급 다섯 달 치가 밀렸다. 하오 씨는 회사를 옮기면서 한국 고용노동부에 임금 체불 사실을 신고했다. 하오 씨는 “노동부에 연락하니 통역을 해주는 베트남 사람이 있었다. 월급이 밀려 있다고 말한 후 이전 회사에서 체불된 돈을 받을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합법적으로 일터를 옮길 수 있는 통로도 열렸다. 하오 씨는 대구를 떠나 부산의 식품 공장과 CNC 가공 공장을 거쳤고, 마지막 공장에서는 월 230만원가량을 받으며 4년 9개월 동안 10억 동(약 5000만원) 이상 모았다. 훙 씨 역시 10년간 사업장 네 곳을 합법적으로 옮겨 다녔다. “일을 끝내고 노동부에 가서 구직 등록을 하면 회사를 하나 소개해준다. 가서 둘러보고 정하면 됐다.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하띤성 꼬담 마을 거리 풍경.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시사IN 전다현 그러나 아직 한국으로 가는 문턱은 높다 릴게임오션파라다이스상어 . 한국어시험과 기능시험을 통과해도 한국 고용주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구직자 명부에 이름만 올린 채 기약 없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응에안성 고용서비스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2023~2025년 2차 시험까지 최종 합격한 4916명 중 출국한 사람은 2429명에 불과하다. 절반이 넘는 2487명이 합격증만 쥔 채 출국하지 못했다. 꾸인 부국장은 이를 ‘제일 어려운 문제’로 꼽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노동자의 취업 계획과 소득, 가정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시험 결과가 요건을 충족했다고 해서 반드시 채용되거나 출국하는 것은 아니다.” 쩐 훙 씨도 기약 없는 희망으로 5년을 보냈다. 200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류를 냈지만, 제조업 분야 시험에 두 번이나 합격하고도 한국으로 가지 못했다. 5년간의 기다림 끝에, 2010년 경쟁률이 낮고 험한 ‘어업’으로 직종을 바꾸고서야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5년 동안 EPS만 좇았다.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한국어만 배웠다.” 학원강사가 “어느 교실에 가도 네가 있으니 아예 반장을 시키자”라고 농담할 정도였다. 합법과 불법 사이 고용허가제가 선순환을 만들기 위해선 한국에서 합리적인 노동환경에 놓인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고용허가제로 입국했다가 살인적인 노동을 견디지 못해 이탈하거나, 재입국 시험에 떨어져 단기 비자로 재입국한 뒤 미등록으로 일한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응우옌 후이 타인 씨(34)는 스물세 살인 2015년, 제주 어선에 올랐다. 현실은 가혹했다. 하루 20시간을 일하고 4시간을 잤다. 한 달 내내 바다에 머물다 육지로 들어오면 겨우 이틀을 쉬게 해줬다. 첫 월급은 140만원. 그를 무너뜨린 것은 고립과 차별이었다. 배 안에서 외국인은 타인 씨 혼자였다. “한국 사람은 같이 먹고, 나는 떨어져서 혼자 먹어야 했다.” 욕설도 그에게만 쏟아졌다. “한국 사람한테 하면 싸우니까, 외국인인 나한테만 욕을 했다.” 응에안성 빈록에 사는 응우옌 후이 타인 씨는 한국에서 20시간씩 일하다 견디지 못하고 ‘이탈’했다. ⓒ시사IN 전다현 2년을 버틴 타인 씨는 배가 제주항에 정박한 날, 비행기표를 끊어 경남 김해에 있는 친구 집으로 도망쳤다. 미등록 신분이 된 순간이다. 그는 김해에 있는 작은 기계 제조 공장에서 7년 6개월 동안 일했다. 한국인 사장 부부와 중국인 노동자, 타인 씨까지 넷이 일하는 영세 공장이었다. 주간 8시간 근무에 일요일은 휴무였다. 그러나 미등록 외국인에게는 보호망이 없었다. 쉬는 날 아르바이트를 나갔다가 망치에 찍혀 손을 심하게 다쳤을 때, 건강보험이 없던 그는 합법 체류 중인 친구의 이름을 빌려 병원 진료를 받아야 했다. 응우옌 후이 히에우 씨는 한국 원양어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시사IN 김세욱 응우옌 후이 히에우 씨(50)의 청춘은 더 깊은 바다에 있다.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던 1996년, 그는 오징어와 참치를 잡는 한국 원양어선에 올랐다. 오후 2시에 일어나 이튿날 아침 6~7시까지 밤을 새워 일했다. 수면 시간은 아침 9시부터 오후 2시까지가 전부였다. “고기가 걸려 올라오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도 곧장 바다에 내던져야 했다.” 히에우 씨가 취재진 앞에서 거친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이 열 손가락 마디마디가 다 참치를 손질하다 칼에 베인 흉터”라고 말하며 웃었다. 파도가 요동치는 배 위에서 살.이 벌어지면 부선장이 굵은 바늘로 직접 상처를 꿰맸다. 2년 승선 후 귀국했다가 다시 배를 탔지만 그동안 번 돈은 가족 생활비로 빠져나가 손에 남은 게 없었다. 육지에서 일하고 싶었던 히에우 씨는 2012년 다시 배를 타러 가던 길에 이탈해 7년 동안 목공소와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미등록 노동자로 일했다. 그렇게 20억 동(약 1억원)가량을 모아 마침내 고향에 돌아왔다. 집이 생겼지만, 고향에 순탄하게 ‘정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야마토사이트 6개월 전 귀국한 타인 씨의 2층집 거실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집은 지었지만 세간살이는 거의 들이지 못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갈 것이냐는 질문에 타인 씨는 맥없이 답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없다.” 김해 공장에서 7년 6개월 동안 기계 부품 만드는 일을 손에 익혔지만, 고향에서 비슷한 일을 하면 한 달에 40만원 남짓을 손에 쥔다. 베트남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베트남 노동자의 월평균 소득은 900만 동(약 47만원)이다. 일하는 환경도 베트남이 더 열악하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타인 씨는 “한국 공장엔 선풍기도 많고 에어컨도 있었다. 여기는 40℃까지 올라가지만 아무것도 없다”라고 토로했다. 히에우 씨도 한국 원양어선에서 배운 오징어 채낚기 기술을 고향 배에 적용해보았지만 3년 만에 그만두었다. “베트남에서는 손으로 조업하는데 한국에서는 현대적인 기계로 조업한다. 그래서 베트남에선 (물고기를) 많이 못 잡는다.” 바다가 있는 하띤성 꼬담에서는 많은 이들이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기후변화로 어획량이 줄면서 외국으로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시사IN 김세욱 하띤성 꼬담에서 만난 응우옌 반 싸인 씨(42)는 2005년부터 6년 동안 경남 양산과 경기 수원의 기계 공장에서 배관을 조립하고 용접했다.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2008년 첫 회사가 부도나자, 사장은 베트남 사람들이 일을 잘한다며 수원에 있는 형의 회사에 그를 소개했다. 일요일과 월요일 연달아 12시간씩 아연관을 용접하며 연기를 들이마신 날, 사장은 큰 인삼주를 가져와 직원들에게 한 컵씩 마시게 했다. 그렇게 모은 5억여 동(약 2600만원)으로 돌아와 집을 짓고 장사를 했다. 2012년부터는 남부에서 배관 용접을 했고, 2021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부르는 곳이 있으면 기계 일을 하고 없으면 택시를 몬다. “일이 있어서 불러주면 하고 안 부르면 운전하러 나간다.” 쩐 티 늉 씨는 하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일로 ‘식당’을 꼽았다. 타이완에서 3년, 한국에서 9년 동안 전자·봉제 공장을 돌며 10억 동(약 5000만원)을 모으고 땅도 샀지만, 고향에선 경력을 살릴 곳이 없었다. 호 반 비 씨 역시 “일단 집부터 완공하고 내년에 무엇을 할지 고민해보겠다”라며 말끝을 흐렸다. 응에안성 고용서비스센터는 귀환노동자를 ‘현대적인 생산환경에서 경험을 축적한 인적자원’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고용서비스센터가 〈시사IN〉에 제공한 보고서에는 ‘제기되는 일부 과제’가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일부는 한국에서 근무할 당시와 비슷하거나 그에 가까운 소득수준의 일자리를 희망한다.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국내에서의 일자리 선택이 때때로 실제 상황과 충분히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귀환노동자가 베트남 노동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들의 ‘눈높이’로 지적한 것이다. 하띤성 꼬담 마을 시장 풍경. ⓒ시사IN 전다현 그러나 눈높이를 낮추라는 행정의 권고는 현장의 구조적 모순을 가린다. 주베트남 한국 대사관 백석현 고용노동관은 귀환노동자가 처한 사회적 구조를 짚었다. “임금이 갑자기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다. 베트남에서 일할 유인 자체가 크지 않다.” 게다가 베트남 사람들의 고향 중시 성향도 무시하기 어렵다. 그는 베트남 사람들이 대도시로 이주하기보다는 가족과 함께 살려는 성향이 강하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돈을 벌어와 사업을 하거나 부동산을 사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임금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들이 돌아온 중부 바닷가 마을 근처에는 한국에서 익힌 일을 이어갈 일터 자체가 드물다. 리엔 씨는 “한국에서 하던 일을 여기서도 하고 싶은데, 같은 일을 하는 회사가 없어서 못한다”라고 말했다. 늉 씨도 같은 말을 했다. “회사가 있으면 일을 할 텐데, 지금은 회사가 있는 지역이 멀고 월급도 얼마 안 된다.” 공장을 찾아 다시 가족을 떠나야 한다면, 같은 이별의 값으로 열 배를 버는 한국이 나은 선택이 된다 온라인 황금성 . 그 끝에서 이들은 다시 떠날 궁리를 한다. 아인 교수는 귀국자들이 해외에 되도록 오래 머물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애초에 베트남을 떠난 이유가 일자리가 없거나, 제대로 된 임금을 주는 일자리가 없어서였다. 돌아가면 똑같은 상황을 마주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오래 해외에 머물고 싶어 하는 거다.” 아인 교수는 귀환노동자들의 ‘재정착’ 상황에 대해 “가족이 더 잘 먹고, 병원비를 내고,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는 있겠지만, 모은 돈이 계층을 바꿀 만큼 크지는 않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다시 떠나거나 해외 체류 기간을 늘린다”라고 설명했다. 다시 한국으로 수많은 귀환노동자 가운데 한국에서의 경험을 디딤돌 삼아 자산가가 된 이는 손에 꼽힌다. 그마저도 한국에서 익힌 기술 덕은 아니었다. 하오 씨는 어학원 일곱 곳을 운영하며 원생 2200여 명을 거느린 사업가로 변신했다. 학원은 귀국 뒤 고등학교 영어 교사였던 아내와 집에서 과외를 하다 연 것이다. 7개 학원 수강생 중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은 유학을 준비하는 20여 명에 불과하다. 하오 씨는 “귀국 후 쓸 일이 없어 한국어를 다 잊어버렸다”라고 말했다. 통영 양식장에서 10년을 버틴 쩐 훙 씨의 성공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성공과 양식장은 아무 관련이 없다. 2020년 귀국 후 그는 온라인 유통 시장의 성장을 예상하고 롯데 에어프라이어의 유통을 시작으로 가전제품 회사 대표가 됐다. “한국 가기 전엔 자격증도 없었고 고등학교만 나왔다. 돌아올 땐 나이도 많아져서 창업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배운 건 한국 문화와 규율, 일하는 태도, ‘빨리빨리’, 그리고 한국인 사장의 꼼꼼함이다.” 하띤성 꼬담 해안가에서 동네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시사IN 전다현 정착하지 못한 이들은 다시 한국을 바라본다. 한국에 가서 일할 기회가 생긴다면 다시 떠나겠느냐고 묻자, 비 씨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싸인 씨도 기회가 되면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 2011년에도 더 일하고 싶었지만, 부모가 장가를 가라며 불러들였다. 지금 여덟 살, 열두 살인 두 아들이 한국에 가겠다고 하면 주저 없이 보낼 생각이다. 리엔 씨도 아이들이 크면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한국은 돈도 벌 수 있고 생활도 편하고, 오래 지내서 정이 많이 들었다.” 타인 씨는 한국을 ‘두 번째 고향’이라 부른다. 너무 가고 싶지만, 미등록 불법체류 이력 때문에 재입국이 쉽지 않다. 그의 낡은 지갑 속에는 한국에서 쓰던 외국인 등록증과 500원짜리 동전 하나가 여전히 부적처럼 꽂혀 있다. 늉 씨의 남편은 한국에서 6년을 일했다. 재입국하고 싶었지만, 비자가 끝내 나오지 않자 2년 전 뉴질랜드로 떠났다. 한국행 문턱을 넘지 못한 이들은 일본이나 타이완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한다. 늉 씨의 남편처럼 뉴질랜드로 떠나는 사람도 있고, 요즘은 유럽으로도 간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그래도 이구동성으로 “한국이 최고”라고 말했다. 베트남 중부, 응에안 빈록에 줄지어선 2층 저택들. ⓒ시사IN 전다현 비 씨의 집은 아직 공사 중이다. 그는 매일 집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한국에 갈 기회가 오면 다시 떠나겠다고 한다. 집을 짓기 위해 한국으로 떠났던 사람이 집을 다 지은 뒤 그 집을 두고 다시 떠날 궁리를 하는 셈이다. 바닷가 마을의 대저택들이 한낮에도 적막한 이유다. 고용허가제는 이들에게 한국에서 일할 길을 열어줬다. 그러나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일자리나 경력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마을에 있는 다음 세대도 같은 길을 바라보고 있다. 싸인 씨는 두 아들이 원하면 한국에 보낼 생각이고, 리엔 씨는 아이들이 크면 자신도 다시 한국에 가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모은 돈으로 만든 마을은 지금도 한국으로 사람을 보내고 있다. ※ ??? ??????????? ?????????? ???????? ???????? ??????????????????? ???????? ?????????????.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table=m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