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허클베리핀. 왼쪽부터 이기용, 이소영, 성장규. 샤 레이블 제공
“조명이 비치지 않아도 좋으니 무대 한쪽에서 기타를 치고, 관객이 몇사람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10대 때 품었던 마음을 28년 뒤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1998년 데뷔해 정규 앨범 8장을 낸 관록의 밴드 허클베리핀. 유행이 바뀌고 인디 음악이 부침을 겪는 동안에도 이들이 멈추지 않은 이유를 리더 이기용은 결국 ‘음악 자체’에서 찾았다. “좋은 음악은 그 스스로가 중심”이라는 믿음,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한 동료가 있었다.
26일 서울 서대문구 허클베리핀 작업실에서 만난 이기용(기타), 이소영(보컬), 성장규(드럼)는 4년 만의 정규 8집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두고 다시 “록밴드의 정체성을 찾아간 음반”이라고 말했다. 기타와 베이스, 드럼을 중심으로 불필요한 소리를 덜어내면서도 긴장감은 높였다. 이기용은 “앨범이 늘어날수록 내공이 깊어지는 대신 느슨해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음반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23일 공개된 앨범에는 ‘멜랑콜리아’, ‘모두가 아는 이야기’, ‘구름을 밀어낼게’, ‘박쥐’ 등 9곡이 담겼다. 이 가운데 ‘멜랑콜리아’ 등 무려 5곡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웠다. 멤버들은 사운드와 가사 면에서 이번 앨범을 대표한다고 판단한 곡들을 골랐다고 했다. 애초 더 많은 곡을 작업했지만 이기용은 “곡 수를 늘리기보다 뺄 노래가 없는 음반을 만들고 싶었다”며 일부 곡을 덜어냈다.
허클베리핀 8집 ‘모두가 아는 이야기’ 표지. 샤 레이블 제공
앨범의 중심에는 고통과 상실을 지나 이전과 다른 자신을 마주하는 상념이 짙게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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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용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큰 슬픔과 고통을 통해 사람이 바뀌기도 한다”고 말했다. 과거 제주에서 4년가량 지내며 힘든 시간을 통과했던 개인적 경험도 녹아 있다. 그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그 덕분에 좋은 것들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사운드에서도 복잡함보다 본질을 택했다. 2022년 낸 7집 ‘더 라이트 오브 레인’에서 여러 소리를 쌓고 가공했다면, 이번에는 기타·베이스·드럼과 최소한의 건반으로 곡을 구성했다. 이소영은 “포크 음악처럼 단순한 음악이 오히려 꽉 차게 만들기 더 어렵다”며 “하나하나에 더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성장규는 “소리를 덜어낼수록 오히려 더 묵직하게 들리도록 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다”고 했다. 이기용은 그 중심에 멜로디를 놓았다. “여전히 멜로디에는 원초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이 난해함으로만 남기보다는 소설처럼 끝까지 사람을 끌고 갈 힘이 있었으면 했어요.”
오랜 시간 함께한 만큼 작업 방식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2집부터 허클베리핀에 합류한 이소영은 “과거에는 녹음 직전 가사를 받아 노래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웃었다. 이제는 이기용이 원하는 감정과 표현을 훨씬 빠르게 읽어낸다. 그는 “하도 오래 같이하다 보니 이제는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것 같다”고 했다.
28년 사이 음악을 만드는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합주실에서 함께 곡을 만들던 시대에서 각자의 컴퓨터 앞에서 소리를 구축하는 시대로 옮겨왔다. 이기용은 이런 기술의 변화를 경계하기보다 받아들이는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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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AI) 음악에 대해서도 “이미 등장한 기술을 되돌릴 수는 없다. 쓰느냐 마느냐보다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가 남은 문제”라고 했다. 다만 결국 중요한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밴드 허클베리핀. 이기용(왼쪽부터), 이소영, 성장규. 샤 레이블 제공
밴드는 앨범 발매에 맞춰 브랜드 공연 ‘옐로 콘서트’를 연다. 22번째다. 오는 31일 서울 케이티앤지(KT&G) 상상마당 홍대 라이브홀에 이어 12월5일 부산의 인디 공연장 오방가르드에서 무대에 선다. 신보 발표 직후지만 공연을 새 앨범으로만 채우지는 않는다. 성장규는 “매년 우리가 생각하는 베스트를 뽑는다. 한번 보면 ‘허클베리핀을 제대로 봤다’고 느낄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오방가르드는 최근 영업정지 처분을 받은 라이브클럽이다. 일반음식。으로 등록된 이곳에서 관객들이 탁자와 의자를 치운 채 서서 춤을 추며 공연을 관람했다는 이유로 식품위생법 시행규칙 위반에 따른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이기용은 클럽 공연이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1990년대를 떠올렸다. 그는 “그때는 공연하다 경찰이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느낌을 늘 갖고 있었다”며 “그런 일이 2026년에 다시 벌어졌다고 하니 황당하면서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고 했다.
밴드에게 라이브 공연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이기용은 “소리에 물성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게 공연이다. 소리가 덩어리로 오고, 깊이와 입체감을 갖고 몸을 전율시킨다”며 “언젠가 죽을 사람들이 같은 시대의 사람들 앞에서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내는 것, 그 경험은 평생 잊기 힘든 추억으로 남는다”고 나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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